고흐, 새 둥지, 1885,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는 미술중개상으로 화랑에서 일하다가 전도사가 되겠다고 영국과 벨기에를 전전한 끝에 스물일곱 나이에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정말로 미술중개상이 된 동생 테오 반 고흐는 그때부터 화가를 지망하는 형에게 매달 생활비 송금을 시작했다. 겉도는 삶에 지친 빈센트는 결국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마저도 얼마가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날 목사인 아버지와 크게 다툰 빈센트는 또 가출 했고 1883년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빈손으로 누에넨에 있는 부모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간의 방황이 이후 그려질 숱한 명화들의 밑그림이 되었겠지만 그때까지 빈센트의 그림 실력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누에넨에서 빈센트는 노동하는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농부와 직조공들을 담은 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그리고 그 시절 최고의 성과는 잘 알려진 「감자 먹는 사람들」이었다. 빈센트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꼽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이전까지 미술에서 노동에 대한 경의가 이렇게 풍부하게 실현된 경우는 없었으므로 이 시절 빈센트의 작품을 근거로 "사회적 사실주의를 실현한 거장"의 반열에 빈세트를 올려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가?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누에넨 시절 빈센트가 관심을 가진 또 다른 주제는 자연 그리고 새의 둥지였다. 그는 시골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푸른머리되새의 둥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고 섭생을 취하는 둥지에서 어떤 강력한 상징을 발견한 듯싶다. 그는 시골 농부의 집을 인간의 둥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둥지를 길지 않았던 생애 내내 그리워했다. 그러나 가정을 가지고 싶었던 그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그 유명한 "영혼의 편지"를 통하여 이 생동감 있고 강렬한 드로잉을 보내면서 "나는 지금 새 둥지를 주제로 한 정물화를 그리느라 바쁘단다. 그 중 네 개는 끝냈어. 자연을 세심히 관찰한 사람이라면 이끼와 낙엽, 초목의 색이 있는 이 그림을 좋아할거야"라고 썼다. 편지는 1885년 10월경에 동생 테오에게 보내진 것이다. 그 해 3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시골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는 끝내 장남 빈센트와 화해하지 못했다. 아니면 그 반대였거나. 그 다음 달에 빈센트는 누에넨을 떠나 벨기에 앤트워프로 갔고 이에 몇 해에 걸쳐 프랑스 파리로 갔고 아를로 갔고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서른일곱 나이에 스스로 삶을 접었다. 1890년 빈세트가 자살로 삶을 접기 전 요한나(Johanna)와 결혼한 동생 테오가 아들을 얻어 동생 가족이 함께 오베르쉬즈우아즈를 방문했다. 빈센트는 새로 태어난 조카에게 새 둥지를 선물했다. 빈센트는 오랫동안 자신을 부양한 동생이 튼 둥지를 부수고 싶지 않았을까? 형 빈센트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형이 떠난 육 개월 후 동생 테오도 삶을 접었다. 사인은 악성빈혈로 알려져 있다.
형제의 뒤에 홀로 남은 요한나는 남편에게 얹혀사는 형 빈센트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형제를 위해 제 몫을 다했다. 그녀는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수백 통의 편지를 세심하게 편집한 후 세상이 빈센트 반 고흐를 추억하고 추앙할 때 그제야 형제의 편지를 세상에 내놓았다. 아침 안개 자욱한 "출근길에 점찍어둔 새 둥지 하나"가 있었는데 퇴근길에는 가로등 너머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누에넨에서 그린 빈센트의 새 둥지 유화의 배경은 칠흑같은 어둠이어서 자꾸 드로잉에만 눈이 간다. 2009
떠다니는 노래
마종기 씀
허둥대며 지나가는 출근길에서
가로수 하나를 점찍어두었다가
저문 어느 날 그 나무 위에
새 둥지 하나를 만들어놓아야지.
살다가 어지럽고 힘겨울 때면
가벼운 새가 되어 쉬어가야지.
옆에 사는 새들이 놀라지 않게
몸짓도 없애고 소리도 죽이고,
떠다니는 영혼이 아는 척하면
그 추운 마음도 쉬어가게 해야지.
둥지의 문을 열어놓고 무엇을 할까.
얼굴에 묻어 있는 바람이나 씻어줄까.
조건을 달지 않으면 모두가 가볍군.
우리들의 난감한 사연도 쉽게 만나서
당신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해도
이제는 아프지도 않은지 웃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