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컨스터블│골딩 컨스터블의 텃밭│1815년경│콜체스터-입스위치박물관서비스

John Constable, Golding Constable's Kitchen Garden, Colchester and Ipswich Museums Service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활동한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의 작품 중 「골딩 컨스터블의 텃밭(Golding Constable's Kitchen Garden)이라는 제목의 1815년 작품이 있다. 골딩 컨스터블은 존 컨스터블의 부친이니 “아버지의 텃밭”이라고 제목을 번역할 수 있겠다. 골딩 컨스터블의 텃밭이라는 작품 제목을 존 컨스터블이 직접 붙인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가 작품을 분류하면서 그렇게 붙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 되었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규정하는 우리 문화와, 타인과의 관계를 떠나 독립적인 개인의 존재를 앞세우는 서유럽 문화의 차이를 작품 제목에서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롭다. 작품 제목을 우리나라 사람이 붙였다면 화가 본인이 제목을 붙일 경우 "아버지의 텃밭"이라 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제목을 붙일 경우 "아무개 아버지의 텃밭"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 제목이 어떠하건 작품은 화가가 자기 아버지의 텃밭을 그린 것이고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동서가 따로 있을 리 없을 것이다.

존 컨스터블│골딩 컨스터블의 정원│1815년경│콜체스터-입스위치박물관서비스

John Constable, Golding Constable's Flower Garden, Colchester and Ipswich Museums Service

존 컨스터블의 부친 골딩 컨스터블은 영국의 대표 농업지역인 서퍽(Suffolk)에 10만평이 넘는 농지를 소유한 지주였을 뿐 아니라 제분소와 곡물을 운송하기 위해 선박까지 소유한 부유한 사업가였다. 골딩 컨스터블이 옥수수를 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있고 존 컨스터블의 작품 중에 옥수수 밭(corn field)을 배경으로 한 풍경화가 몇 점 남아 있다. 19세기 후반 존 컨스터블의 딸인 이사벨(Isabel)은 부친이 남긴 유작을 런던 빅토리아-앨버트미술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V&A)에 기증했는데 이 기증품 속에 골딩 컨스터블의 가옥(Golding Constable’s House)이라는 보존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유화 작품이 있다. 존 컨스터블이 자신이 나고 자란 집을 담은 작품으로 가옥 규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습작 제목도 "존 컨스터블의 생가"가 아니라 "골딩 컨스터블의 가옥"이다. 골딩 컨스터블의 텃밭은 이 가옥에 딸린 텃밭을 담은 작품이다. 부유한 상인이 검소해서 혹은 취미로 텃밭을 가꾼 것은 아닐 것이고 오늘날과 같이 유통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제철 과일이나 야채는 직접 재배해서 먹는 것이 빈부를 떠나 그 시대 농촌 마을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존 컨스터블│골딩 컨스터블│1815년│테이트 갤러리

 John Constable, Golding Constable, Tate Gallery

형에게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존 컨스터블의 집안의 실질적 장남이었고 학교 졸업 후 꽤 오랜 기간 동안 부친 사업을 도왔다. 가업 보다 미술에 관심을 둔 아들을 골딩 컨스터블은 못 마땅해 했고 동생 에이브럼(Abram)이 가업을 잊겠다는 뜻을 보이고서야 존 컨스터블은 원하는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가업을 놓은 직업 화가로서 돈이 되는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경제적 기반 마련을 위해 매우 중요했고 존 컨스터블이 남긴 초상화 작품들을 보면 그가 초상화를 잘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존 컨스터블은 초상화 대신 당시 미술 장르로 자리잡지도 못한 순수 풍경화를 고집스럽게 그렸다. 당연히 존 컨스터블의 작품은 잘 팔리지 않았고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존 컨스터블의 작품은 대부분 영국에 그대로 남아 오늘날 영국 주요 미술관의 전시 목록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많지 않은 존 컨스터블의 초상화 중 부친 골딩 컨스터블을 그린 초상화 한 점이 전한다. 골딩 컨스터블의 초상화를 본 순간 노련한 사업가의 풍모와 함께 후덕한 사람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분명 아들 존 컨스터블이 부친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가업 대신 화가의 길을 택한 장남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아들의 미술 공부를 위해 아버지는 돈을 마련해주었을 뿐 아니라 1816년 부친 사후 존 컨스터블이 상속 받은 재산은 영국에서 인기 없는 화가였던 존 컨스터블이 그의 신념대로 풍경화에 천착할 수 있는 경제적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풍경화 아버지의 텃밭을 보면 골딩 컨스터블의 초상화가 오버랩 되고 가로 50cm 크기로 그다지 크지 않은 캔버스 안에서 등을 보이며 텃밭에 쟁기질을 하고 있는 사람이 뒤돌아 보면 골딩 컨스터블의 얼굴이 나타날 것 같다.

East Bergholt, Suffolk, England

2012. 6.

 

영국에서 살던 몇 해 전 6월에 존 컨스터블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 자란, 골딩 컨스터블의 가옥이 있던 이스트 버골트(East Bergholt)를 찾아갔다. 골딩 컨스터블의 집은 이 백 오십 년 세월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다만 그 자리에는 “이곳이 존 컨스터블이 어릴 적 살던 집이 있던 자리”라는 표지만 남아 있었다. 혹시 골딩 컨스터블의 텃밭 그리고 또 다른 작품 골딩 컨스터블의 정원」이라는 작품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까 싶어 옛 집터에 세워진 오늘날 새 집을 기웃거려보았는데 나와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지 새 집 주인은 집 주변을 빽빽하게 정원수로 가려 놓아 텃밭과 정원은커녕 집의 윤곽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영국 집은 대개 넓기보다 깊은데다 출입구를 전면에 배치하고 정원은 뒤뜰에 두어 밖에서 그 속내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골딩 컨스터블 가옥이 있던 터를 지나 이스트 버골트의 종탑 없는 교회를 한 바퀴 돈 후 목을 축이러 동네 펍(pub)의 문을 열었더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가득 차있어서 마치 경로당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시골에서 젊은 사람보기 어려운 것은 영국도 마찬가지다. 낯선 이방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고개를 돌려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던 할아버지 얼굴이 존 컨스터블의 초상화 속 골딩 컨스터블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 아트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한 클림트  (0) 2021.12.10
빈센트의 둥지  (0) 2021.12.09
백제관음상  (0) 2020.01.16
옥인동 47번지  (0) 2019.12.13
마상청앵도  (0) 2019.04.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