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 앙티브 · 1888 · 런던 코톨드갤러리

Claude Monet, ANTIBES,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UK

2013. 4. 23.

유럽인들이 15세기 그들이 말하는 대항해 시대를 시작으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침략하고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약탈한 다음 도달한 곳은 중국과 그 인근 국가들, 그들 유럽인들 기준으로 동아시아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중국을 쉽게 침략하고 약탈할 수 없었다. 유럽인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중국의 경제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역량은 오히려 유럽인들보다 앞서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통상으로 우선 중국에 접근했다. 문제는 중국이 유럽에 팔만한 물건들은 넘쳐났던 반면 유럽인들이 중국에 팔만한 물건이 마땅치 않았던데 있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그들의 신대륙에서 약탈해 온 귀금속, 특히 남아메리카에서 어마어마한 양이 쏟아져 나오던 은(銀)으로 동아시아에서 구매한 물품의 대금을 결제했다. 그들이 은으로 결제하고 수입해간 대표 상품은 중국의 자기(瓷器)였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중국의 자기는 그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하이테크 제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수입해간 자기는 유럽에서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오늘날 유럽의 뭇 궁전과 고성, 박물관의 소장 전시 목록에는 그때 유럽인들이 중국에서 수입해간 자기들이 빠지지 않으며 어느 왕가나 부호는 중국 자기를 수집하느라 재정을 거의 탕진해 먹었노라는 이야기가 이 시기 유럽의 역사책 행간에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중국 송(宋)나라 때부터 도자기의 명품들을 쏟아내던 양쯔강 남안 시전(市鎭) 도시 징더전(景德鎭)에는 이들 자기를 구매하여 유럽으로 실어 나르던 유럽 상인들과 무역선들이 넘쳐났다.

중국 명나라 시대 15세기 중반 징더전 자기,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Jar with Winged Animals over Wave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그러나 중국 징더전의 영화는 17세기 중엽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하는 교체의 혼란기에 균열이 생겼다. 중국의 민란과 만주족의 침입으로 인한 혼란기에 징더전의 자기 생산은 일순 멈추어 버렸고 중국과 유럽간 도자기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다. 수요는 여전한데 공급이 올 스톱 되어버린 상황에서 유럽인들은 중국 자기의 대체 공급선을 찾기에 혈안이었고 이 틈새를 채운 것은 바로 일본의 자기였다.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바쿠후(幕府)는 나카사기(長崎)의 인공섬 데지마(出島)에 상관을 설치하고 당시 동서 교역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던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교역을 허용하고 있었는데 중국과의 자기 교역이 끊겨 대체 공급선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는 이 데지마 상관을 통해 일본 자기를 수입해가기 시작했다. 목기나 기껏 해봐야 옻칠한 칠기 그릇을 쓰던 일본이 17세기에 접어들자 중국을 대신하여 유럽에 자기를 수출하게 된 것이다. 일본이 자기 기술을 습득한 것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대로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공들을 무더기로 납치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바탕으로 자기 생산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코발트 블루라는 청색 안료를 주로 이용하던 중국 자기에 비해 일본은 고온소성 과정에서도 빛깔을 잃지 않는 붉은 색 안료를 개발했으며 자기에 채색을 한 문양이나 회화들은 세계적 히트 상품이었던 중국의 것도 그들이 기술을 뺏어온 조선의 것도 아닌 일본 고유의 문양이나 회화들을 그려 넣었다. 그렇게 유럽으로 수출된 일본의 자기는 단순히 중국 자기의 대체 공급선 이상의 인기를 끌었다. 그 사이 중국에서는 청나라 건국 후 내부 안정을 이루고 자기의 생산과 유럽으로의 수출을 재개했지만 일본이라는 경쟁자가 뛰어든 이후 중국은 독점 공급자의 지위를 상실했다. 게다가 18세기 초 독일의 마이센 자기(Meiβener Porzellan)를 필두로 유럽에서도 양질의 자기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 자기 생산 기술은 프랑스로, 네덜란드로, 영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공산품 제조 기술이 발달하자 유럽 자기 제조업은 더욱 다양한 안료와 재료, 소성기술을 발전시켜 중국의 자기보다 훨씬 고품질의 자기를 생산해냈다. 이후 이 시장에서 중국의 지위는 오히려 저가품 자기를 공급하는 지위로 급전직하 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 자기 수집가들의 동양풍 이국 기호를 충족시키는 동양으로부터의 수입 자기의 지위는 중국 자기가 아니라 일본 자기가 차지하게 되었다. 일본의 자기는 조선으로부터 뺏어온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자국 내에서 발전시켜 유럽으로 수출한 아리타(有田) 자기 수준에만 머물지도 않았다. 19세기 일본이 서구 사회를 향해 문호를 개방한 이래 그들은 이미 중국을 추월하여 고급 자기제품을 생산하던 유럽의 자기 생산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오늘날까지도 고급 자기제품을 꾸준히 생산하여 수출하는 주요 자기 생산국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에도시대 17세기 중반 아리타 자기, 미국 LA 카운티미술관 소장

Arita ware dish, Japan, c. 1650s-1670s , LA County Museum of Art

자기는 운반과정에서 깨지기 쉬워 근대 유럽과 동아시아를 오가던 범선에 실려 먼 항해를 감당해야 했던 시절에는 짚이 자기 운송을 위한 완충재로 이용되고 있었다. 운송도중에 자기가 얼마나 깨어지기 쉽고 한편으로 중국에서 수입된 자기가 유럽에서 얼마나 귀중한 물품이었던지 하는 것은 깨진 자기에 세심하게 구멍을 뚫고 철사 따위로 땜빵한 흔적이 남아 있는 옛 유물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요즘처럼 뽁뽁이, 에어 큐션 랩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일본은 유럽으로 자기를 수출할 때 포장 완충재를 마련하는데도 나름 독창성을 발휘했다. 당시 일본에 지천으로 흔했던 판화 폐지를 도자기 포장 완충재로 활용했던 것이다. 근대 이전 종이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 종이를 포장 완충재로 이용할 정도였으면 당시 일본의 제지 산업은 얼마나 발달했던 것이며 판화가 인쇄된 종이가 폐지로 이용될 정도였다면 당시 일본의 판화보급은 또 얼마나 활발했을까? 몰라서 그런 것인지 혹은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것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이야기되고 있지 않지만 그리고 이를 공적 영역에서 언급하려 들다가는 친일파로 매도되어 사이버 테러를 당한 채 요즘 표현대로 발리버리기 쉽지만 내가 이해하기로 일본은 미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문화나 전수받고 있다가 19세기에 접어들어 어느 날 덜컥 강대국이 된 나라가 아니다. 상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상대를 극복할 수 없다. 아무튼 이 자기 포장 완충재로 처음 유럽에 소개된 일본 판화는 유럽 근대 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며 특히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미술이 빅 히트를 치던 시절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 판화에 사용된 기법을 그들 회화에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일본풍, 곧 자포니즘(Japonisme)이라는 예술 현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 판화에 나타난 단순하고 거침없는 구도와 강렬한 색채, 흔히 여백의 미로 표현되는 대상의 과감한 생략과 집중은 대량 인쇄를 해야 하는 채색 판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지만 이전 유럽 미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형식으로 곧 유럽의 화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호쿠사이 목판화, 가나가와 해변의 거대한 파도, 1830~1832, 도쿄국립미술관

Katsushika Hokusai, The Great Wave Off the Coast of Kanagawa, Tokyo National Museum

고갱, 드가, 쇠라, 로트렉, 보나르 등등 기라성 같은 많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 판화에서 배운 기법들을 그들 미술에 적극적으로 차용했지만 그 중 고흐와 모네가 이 일본풍을 자신의 회화에 적용하는데 가장 열심이었다. 고흐는 아예 일본의 판화를 모사한 회화를 수 점 남겼으며 모네 역시 작품의 소재로 일본 전통 의상이나 일본 물건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고흐는 400여 점이 넘는 일본 판화 작품을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네 역시 화가로서 안정기에 접어들 즈음 구입한 파리 근교 오늘날 모네의 집으로 알려진 지베르니 저택의 한 방을 온통 자신이 소장한 일본 판화로 채워 넣었고 그 집 정원을 일본식 정원으로 꾸며 이 정원을 배경으로 이후 모네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수련(睡蓮) 연작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작년 봄 지베르니에 화사한 벚꽃이 바람에 날릴 즈음 나는 모네의 집에서 그가 수집한 일본 판화들을 봤고 또 그의 정원 연못에 놓인 일본식 다리 위를 건넜다. 그리고 올 봄 런던 코톨드 갤러리에서 일본풍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모네가 남긴 작품 앞에 또 서 있었다. 빈 배경을 바탕으로 해변에 외로이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이것은 당연히 동아시아 풍 회화에서 가져온 모티브였다. 그림을 보는 순간 이 작품을 농담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흑백 카메라로 사진으로 찍어 인화한 후 동양풍의 족자 위에 얹어 놓는다면 틀림없이 이른바 동양화로 보이게 되리라 싶었다.

모네, 생트-앙트레스에 있는 정원, 1867,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Claude Monet, The Garden at Sainte-Adresse, Metropolitan Meseum, New York

호쿠사이 목판화, 사사예도에서 본 후지산, 19세기, 뉴욕 부룩클린미술관

Katsushika Hokusai, Fuji from the Platform of Sasayedo, New York Brooklyn Museum

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 시키는 인상파 회화 사조가 하필이면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등장했을까? 그 세세한 배경을 푸는 일이야 미술사를 공부한 전문가의 몫이겠지만 도자기 포장 완충재를 매개로 유럽에 도착한 자포니즘의 영향과 함께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이에 따른 화학 기술의 발달 또한 결정적 요인의 하나이리라.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질 좋은 안료 특히 밝은 색채를 자유롭게 화폭에 표현할 수 있는 물감은 가격은 매우 비쌌다. 회화의 생산 원가가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 회화의 수요처는 왕족이나 귀족, 교회와 같은 부유층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그 소재는 이들의 기호에 맞는 종교화나 초상화가 대종일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받지도 않았는데 값비싼 물감을 들여 그림을 그리는 일은 화가에게 생업을 건 모험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에 따라 물감의 가격이 점점 내려가는 한편 산업혁명 이후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의 수, 흔히 중산층이 점점 늘어나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이들의 문화적 욕구가 분출되자 회화 작품의 공급이 원활해지고 동시에 수요가 증가하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이 되었고 그 접점에서 인상파 미술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주 런던 코틀드 미술관에 있던 모네의 그림의 모티브, 드넓은 해안가와 그 해안을 배경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먼 산, 그리고 그 바닷가에 외로이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는 분명 자포니즘의 영향에서 온 것이 분명하나 그 밝고 다양한 채색을 바탕으로 한 필선은 산업혁명의 수혜를 입은, 눈부신 화학 기술의 발달의 은혜를 입은 바로 19세기 유럽의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화라는 것은 일방에서 일방으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계기가 불행한 것이었든 평화적인 것이었든 서로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 교류를 통하여 발전적 동인을 찾아 내어 교류를 통해 얻어진 성과를 성장시키는 것은 문화권 각자의 몫이라는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런던 코톨드 갤러리에 걸린 모네의 그림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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