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ak Levitan_Over Eternal Rest_1894_The Tretyakov Gallery_Moscow, Russia

이삭 레비탄 작품, 영원한 안식 위에서, 1894, 모스크바 트레챠코프미술관

서양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곰브리치(Gombrich)의 『서양미술사』 원 제목은 “The Story of Art”이다. 『서양미술사』는 서양미술을 개관하는 훌륭한 저작이지만 '미술의 역사' 로 직역되는 다소 오만한 원제는 번역 되면서 『서양미술사』로 격하되었다. 그 『서양미술사』가 꽂힌 서가 아래서 『러시아미술사』라는 책을 읽었다. 『러시아미술사』 읽으며 서가를 힐끗 올려보다 든 생각은 『서양미술사』라는 제목조차도 과분하다는 것이다. 『서양미술사』는 기껏 『서유럽미술사』 정도로 의역되어야 마땅하다.

 

중세 러시아 종교화에서부터 현대 러시아 미술에 이르기까지 주요 화가의 편년을 따라 저술된 『러시아미술사』의 행간에 퍽 마음에 든 그림이 하나가 있는데 1894년에 이삭 레비탄(Isaak Levitan)이 그린 「영원한 안식 위에서」(Over Eternal Rest)라는 그림이다. 그 무렵 서유럽에서는 고흐가 세상을 등지고 모네가 일련의 볏짚단 그림을 세상에 내놓고 있었다. 그 무렵 러시아에서는 화가들이 모스크바의 뒷골목에서, 광활한 툰드라의 대지 위에서, 칼 바람이 넘나드는 볼가강 언덕 위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전에 알지 못했다. 그 러시아 화가들의 그림은 동시대 어느 서유럽의 화가들과 비교해서 소재의 선택이나 완성도, 작품의 품격에 이르기까지 전혀 뒤질 것이 없는 걸작들이었다. 그런데 책에 소개된 많은 러시아 화가들 중에 유독 이삭 레비탄의 그림에 이르러 내 눈길이 오래 머물러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보다 사물에게서 더 큰 위안을 얻는 내 성격 때문일 것이고 그러므로 인물화보다는 풍경화에 더 큰 애정을 느끼는 내 기호 탓일 것이며 그의 그림이 내가 그 전에 알아온 어떤 화가의 풍경화보다 훌륭한 것이었기 때문임은 물론 어쩌면 요즘 내 마음, 내 기대와 가장 흡사한 풍경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삭 레비탄은 1860년 리투아니아의 가난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10살 때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오늘날 러시아를 대표하는 풍경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도  러시아인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정식 미술학교에서 체계적인 미술수업을 받았지만 이른 나이에 양친을 여위고 유태인으로 태어나 이방인 아닌 이방인으로 러시아에 적을 두고 살며 겪었던 고난에도 불구하고 레비탄은 평생을 거쳐 뛰어난 풍경화를 많이 남겼다. 책에서 소개된 몇 점 풍경화 그리고 검색으로 그의 작품들을 접하며 『영원한 안식 위에서』만큼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는 것을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볼가강 언덕 위에서 광각으로 그의 시야에 담겨 캔버스로 옮겨진 『영원한 안식 위에서』라는 작품이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

 

혁명의 나라 러시아 그리고 그 격동기였던 19세기 후반 치열한 현실 참여를 모토로 민중의 삶에 파고든 혁명의 미술들과 엄격한 리얼리즘의 토대 위에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이동파(移動派) 미술을 건너 삼분의 이쯤 읽어온 『러시아미술사』는 이제 진짜 혁명의 시대 러시아 미술로 나를 안내하고 있다. 그 혁명의 격변기에 자연을 그리며 살았던 이삭 레비탄은 새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도 그것을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예술가로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이다"라는 이삭 레비탄의 말이야말로 어쩌면 회화의, 예술의 본질에 한결 가까이 서있어 본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을까 한다.

 

『러시아미술사』를 읽으며 마주친 군데군데 뜬금없는 비문, 난삽한 스토리 텔링, 거슬리는 감정 과잉 때문에 글을 쓰는 작가로서 저자에 대하여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지만 러시아 여행길에서 우연히 접한 러시아 미술에 매료되어 그에 대한 연구를 평생의 업으로 삼아 천작한 작가의 끈기 그리고 그 결과물로 내놓은 책 『러시아미술사』 신선함에는 아낌없이 후한 점수를 주겠다. 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출강까지 한다니 부디 훌륭한 재능을 가진 후학들을 길러 그들이 보다 깊이 있는 또 다른 "러시아미술사" 내놓아 우리의 문화적 안목을 깊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바란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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