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 박찬욱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박찬옥 감독의 작품이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소소한 일상을 따뜻하게 그리는 재주를 지닌 좋은 감독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쉽게도 『질투는 나의 힘』 이후 더 이상 그녀의 이름이 걸린 영화를 볼 수 없다. 뜬금없이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질투가 갖가지 양태로 나타나는 사람 행동에 큰 동인이 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전거와 여행이라는 제목에 혹해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이라는 책을 덥석 샀는데 머리말을 조금 읽다가 덮어 버렸다. 책은 미국 유학 중이었던 저자가 2005년 대학원 학위 과정을 마친 것을 기념 삼아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해 미국 서부 오레건주 플로랜스에 도착하는 제목 그대로 북미대륙을 자전거로 횡단하는 여행기였다. 머리말에 담긴 저자의 계산으로는 총 6,400km에 이르는 거리를 자전거로 달리는데 80일 걸렸다 한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겨레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나름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기자생활이 생업이 되어 감을 느낄 때 과감하게 기자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대학원 학위 과정을 밟고 미국 라디오 방송국에 취직해 PD로 일한 경력을 가진 저자는 미국 횡단 자전거 여행도중에 분량이 만만치 않은 여행기를 집필했으며 여행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여행 중 틈틈이 번역 일에도 매달렸다고 한다. 슈퍼맨이다.
반면 법정 휴가조차 일 년 내 다 써 본적이 없을 정도로 생업에 그야말로 매몰되어있고 그처럼 사표 던지고 유학을 떠날 배짱도 능력도 되지 못하는 나는 오래 전부터 서울과 부산 편도 구간을 자전거로 달리는 나름 원대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서도 그 구간을 실제 왕복하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살랑살랑 부는 가벼운 봄바람의 엄청난 위력을 자전거의 안장에 위에 앉아 깨닫게 된 후부터 북풍이 부는 겨울에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남풍이 부는 여름에는 부산에서 서울로 자전거를 타고 가본다면 며칠 걸릴 것이며 그 기간 동안 직장에 휴가를 낼 수 있을 것인지 불 꺼진 침대에 누워 이리 저리 체위를 바꾸어 가며 상상하다 잠에 빠져드는 것이 고작인 한심한 나는 자전거로 아메리카를 횡단했다는 저자가 토해낸 일성을 보는 순간 김이 빠져버리고 말았으며 머리말만 읽고 책을 덮은 행동은 질투 탓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제 아침 마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을 책이 떨어졌고 우연히 그 거창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의 표제가 눈에 들어와서 가볍게 한번 읽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책을 가방 안에 넣었다. 그리고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책장을 넘기는 동안 저자에 대한 나의 질투는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흔한 신변 넋두리 격의 여행기 대신 자전거를 타는 개인으로서의 진솔한 삶과 미국 역사와 그 속에 녹아 있는 미국 시민들의 평범하고도 농밀한 일상이 담겨 있었다. 이야말로 내가 늘 읽고 싶어 하는 이야기 아닌가? 게다가 머리말 다음 서장에서 저자는 이미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자전거 여행을 두 차례나 해낸 주디라는 예순 여섯 살 할머니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대목에서부터는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지고 말았다. 주디라는 할머니는 20년간 간호사로 일했다. 그 후에 음악대학원에 진학해서 피아노를 배웠고 지금은 피아노를 가르치며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다고. 56세 때 담배를 끊은 뒤 불어난 몸을 주체할 수 없어 자전거에 올라탔다가 3km도 못 가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시작한 자전거로 석 달 뒤 그녀는 서울과 부산거리를 왕복했고 또 두 차례 6,700km 미국대륙 횡단 자전거 여행을 한 것이다. 나의 질투를 향해 날린 저자의 마지막 치명타는 다음과 같다.
'자전거는 다리의 연장일 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리고 귀가 후 이 깊은 밤까지 책을 반 가까이 읽었다. 내일이면 나머지마저 다 읽게 되리라. 언제 나는 내 자전거를 몰고 서울과 부산 또는 부산과 서울 사이를 여행해볼까? 질투가 사라진 자리 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하다는 것을 책 한 권으로 또 알았다. 가을이 완연하다. 누가 그랬지, 존 레넌의 휘파람 소리가 기막힌 이 노래는 가을에 들어야 제격인 노래라고. 노래처럼, 나는 그저 질투가 많은 남자였을 뿐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그 희망을 일깨워준다.
위 글은 2005년에 출간한 저자의 책을 읽고 2006년에 쓴 잡문이다. 저자는 2019년에 출판사를 바꿔 같은 책의 개정판을 냈고 2021년 나는 아직 서울-부산 자전거 여행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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