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노팅 힐

Portobello Road, Notting Hill, Kensington and Chelsea, London, UK

2012. 6. 28.

 

예정보다 훨씬 일찍 런던에서 일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 사이 틈을 내어 에어컨도 없는 런던 지하철 타고 노팅 힐 게이트(Notting Hill Gate)역으로 구경 갔다. 한 여름,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 지하철을 탄다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상상이라도 했던가?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지하철 회사 서버는 성난 네티즌들의 항의에 마비가 되고 말것이다. 런던 지하철 대부분은 한 여름에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다. 아니 지하철 객차에 아예 에어컨이 달려 있지 않다. 어제 런던 기온은 올 들어 최고치인 30도 가까이 육박했다. 텁텁하게 훅 하고 치고 들어오는 뜨겁고 오염된 공기, 게다가 세상 온갖 잡다구리한 냄새들의 종합세트를 흠뻑 들이 마시며 한 여름철 런던 지하철 타기, 런던 체험 관광코스로 강추하는 바이다. 아무튼 이렇게 써놓고 보니 런던과 그곳서 일하고 있던 나까지 참 처량했다. 로맨스를 생각해 볼 순간이다.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이라는 영화가 로마라는 도시와 로맨스라는 스토리를 연결시키듯 『노팅 힐』(Notting Hill, 1999)이라는 영화는 런던이라는 도시와 로맨스라는 스토리를 연결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래서 외국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꾸며진 세트장 같은, 그럼에도 런던에서도 가장 유명한 마켓이라는, 내가 생각하기에 당치도 않은 추천으로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노팅 힐의 포토벨로 마켓(Portobello Market)에는 평일임에도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고 영화 『노팅 힐』에 등장하는 바로 그 자리, 영화에서 여행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작은 서점이 있던 그 자리에는 많은 여성 관광객들이 사진 한 장 담아 가고자 여념이 없었다. 영화에서 그 서점의 주인은 그를 아는 모든 여성들의 로망 휴 그랜트(Hugh Grant)가 배역을 맡았고 그와 로맨스를 만든 여주인공은 입이 큰 여자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였지. 비싼 항공료를 치르고 열 두 시간이 넘게 이코노미 좌석에 구겨져 앉아 먼 런던까지 날아왔을 것이며 찜통 지하철을 타고 노팅 힐까지, 게다가 지하철에서 내려 다시 만만찮은 거리를 걸어 노팅 힐 서점 앞에 선 젊은 여성 그대들 기념사진 한 장 찍으며 런던에서 휴 그랜트 같은 남자를 만나는 로맨스를 꿈꿀 자격이 있다. 그런 꿈조차 꾸지 못하는 나도 그 옆에 서서 못 찍는 사진 한 장 박았으니 로맨스를 꿈꾸는 것은 그대들이 힘들여 당도한 이곳 런던에서 가질 수 있는 특권이려니 마음껏 꿈꾸라 즐기시라 하였다.

 

지난 기억을 뒤집어 봐도 내가 『노팅 힐』이라는 영화를 봤던지 확실하지 않다. 대충 스토리 라인을 떠올릴 수 있으니 본 것 같기도 한데 워낙 영화에 대해 이곳저곳에 떠도는 정보나 이야기들이 많아 글을 통해 읽었거나 아니면 누구의 입을 통해 들어서 개략적인 스토리 라인이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궁금해서 영화의 제작년도를 알아보니 1999년이다. 그때 나는 불쌍한 우리나라의 직장인으로 이른바 IMF 탓에 위기를 겪고 있던 회사에서 짤리지 않기 위해 후달리며 일을 하고 있었으니 영화 속의 로맨스 따위가 나의 심금을 울릴 턱이 없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십 수 년을 뛰어 넘어 영화의 현장 노팅 힐에 나는 서 있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내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성과 로맨스가 아니라 지나온 십 수 년 전 너머 그곳, 내가 살았던 가난했으나 그리운 그 시절과의 로맨스가 아니었나 싶다. 찾을 수 없는 나의 로맨스처럼 여행전문 서점은 간판만 그대로일 뿐 유리창 가득 ‘떨이(SALE)’를 덕지덕지 발라 놓은 싸구려 신발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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