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니 대학 시절보다 더 넉넉한 시간적 여유를 즐겼던 적이 없었던 것 같고 덕분에 그 이전 혹은 그 이후에 본 영화를 합한 것보다 더욱 많은 영화를 본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많은 좋은 영화들은 대개 대학 시절에 보았던 영화들이다. 당시 학생회관에서 무료로 영화를 자주 상영해주었는데 학생회관의 상영시설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보기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고 최신작은 아니더라도 일반 상영관에서는 흥행 때문에 상영할 수 없거나 개봉되었다 하더라도 금방 간판이 내려간 좋은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창구가 학생회관 공연장이었다. 더욱이 학생회관은 내가 다니던 상경대 건물 옆에 있어서 강의 사이사이 여유가 있을 때면 늘 영화가 상영되던 학생회관을 찾았고 매월 초 학보에 게재되는 그 달의 영화 상영일정을 오려서 수첩 사이에 넣고 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어제 문득 생각난 그 시절의 좋은 영화가 1989년 작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라는 영화였는데 미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미국인들의 이야기임에도 이른바 할리웃 영화와는 꽤 격이 다른 영화여서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영화이다. 1950년대초 슬럼이 된 뉴욕의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철강 노동자 군상들과 노동조합과 회사와 경찰들의 부정과 파업사태, 호모 섹스, 잔인한 폭력, 매매춘, 미혼모 문제 등 마치 진창 같은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이 진창을 비집고 불쑥불쑥 기묘한 사랑의 꽃이 피어 오르고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종막에 이르러서는 또 어처구니 없게도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영화는 표현하였다. 게다가 이 영화를 내 기억에 오래 남긴 잊지 못할 명 장면이 있는데 남자 패거리들과 작당을 하고선 순진한 사람을 꼬여 성관계를 가진 후 이를 빌미로 남자를 등쳐 먹는 창녀 트랄라를 몰래 흠모하는 덜 떨어진 소년 조르제트가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먹이감을 찾아 슬럼가를 배회하는 꽃뱀 트랄라 곁을 조르제트가 스치듯 지날 때마다 배경으로 울리는 너무도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곡 「A Love Idea」는 영화보다 더 유명해서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CD로 나온 『브룩클린...』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바로 샀던 기억도 새롭다. 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시작된 객지생활 도중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겨 다니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어제 깊은 밤에 서가 한 켠을 살펴보니 그 CD 앨범은 얌전히 제 자리에 지키고 있었다.
전자기타를 피크(Pick)없이 손가락를 연주한다 해서 붙여진 핑거링 주법으로 유명한 대표적 기타 연주자이자 유명 밴드인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의 리더이고 이전부터 내가 경탄해마지 않던 주옥 같은 명곡들을 만들고 부른 그 마크 노플러(Mark Knopfler)가 이 영화의 음악을 손수 작곡하고 프로듀싱한 마크 노플러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바 그 마크 노플러가 바로 그 마크 노플러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의 놀라움, 실력 있는 뮤지션의 역량이 어디까지 미치는가를 확인한 그 경이로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늦잠에서 깨어난 토요일 오전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오디오에 꽂고 순서대로 하나 하나 들어보는 아홉 곡의 주옥 같은 멜로디는 창가로 넘어오는 조금의 습기조차 머금지 않은 순수한 바람과 어울려 창 밖의 가을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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