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중 부산에 가 차례 지내고 나니 할 일이 없어서 밤 늦게까지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연히 추석특선영화 『벌새』(House of Hummingbird)를 봤다. 아무 정보 없이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치고는 너무 재미있게 봤다 싶어서 그제야 검색해보았더니 작년 2019년 8월에 개봉된 영화라 하여 놀랬고 외국에서 주는 영화 관련 상 을 꽤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작년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등에서 감독과 배우들이 줄줄이 상을 받은 이름난 영화라 하여 또 놀랬다. 내 눈에 재미있다 느껴진 까닭이 충분했던 것이다. 대형 영화제작회사의 기획과 자금 없이 만들어 낸 영화란 뜻에서 독립영화라 하는 것 같은데 배급회사 입장에서는 큰 부담 없이 적당한 선에서 라이선스 요금 받고 TV 방송사에 추석특선 영화로 방송되도록 허가한 것이리라.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94년이고 공간적 배경은 강남 대치동이며 그 시공간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를 둔 여자 중학생이 겪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된다. 나는 그때 어디서 뭐하고 있었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1994년이라는 나 역시 지나쳐온 시간들을 빼고는 영화 속 이야기와 내가 살아온 지난 날의 교집합을 단 1도 찾을 수가 없는데 영화가 재미있다 느껴진 것은 어인 까닭인가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래서 영화가 흥미롭고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는 싱거운 결론을 혼자 내리고 말았다.

영화는 “응사”의 독립영화 버전이라 하겠고 또 구태여 검색해볼 필요도 없이 주인공 은희로 분한 대본을 쓰고 감독까지 겸한 분의 자기 경험을 풀어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 성장기와 가족사를 그 시대 사회적 맥락과 잘 연결시켜 놓은 좋은 영화다 싶었다. 예술로 표현되는 모든 이야기 극 영화의 출발점이 거기서 비롯될 것이다. 나이 오십 줄 아재는 그 감정을 어찌 표현해야 하나 모르겠다만은 주인공 은희는 자기를 따르는 후배에게 굉장히 친밀한 심리적 교감을 느끼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후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당황하여 후배에게 ‘너 나 좋아했잖아?’라고 물으니 후배의 대답이 이랬다.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누구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학기가 바뀌면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중학생 은희는 깨달았으리라. 영화는 자주 역광 속 바람에 날리는 은희와 엄마, 그 주변 인물들의 머리카락 실루엣을 비춰준다. 딱히 기발하지도 않고 기술적 완성도가 높은 테크닉으로도 보이지 않는데 보는 나로서는 꽤 깊은 여운이 남는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음으로 깊이 따르던 학원 선생님이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사망한다는 설정은 과하지 않나 싶지만 대원외고와 서울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하던 은희를 자주 후려 패 고막까지 터지게 한 못난 오빠에 대해서는 영화로 달콤한 복수를 한 것이 아닌가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란 영화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재미있게 봤다.

왁스 - 사랑은 유리같은 것

영화 『벌새』 삽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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