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상청앵도 │ 단원 김홍도 │ 18세기 후반 │ 간송미술관

 

그림을 볼 때 우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을 읽기 전에 나도 그랬다. 그러나 우리 옛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읽어야 한다. 우리 옛 글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오주석의 저작들은 나를 우리 옛 그림의 세계로 인도한 길잡이였다. 특히 역작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는 내가 알던 풍속화가 김홍도의 격을 뛰어난 걸작을 남긴 문인화가로 훌륭한 교양인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게 했다. 삼백 년 시공을 넘어 한 화가의 내면이 그리는 궤적을 쫓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가 사망한 년도조차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흔적, 그의 심상의 말미라도 되짚어 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남긴 그림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주석이 그의 저작에서 밝힌바 있거니와 단원의 걸작들 중 최고작을 꼽으라면 나 역시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를 꼽겠다. '말을 타고 꾀꼬리의 울음소리를 듣는 그림'이라는 멋진 제목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림을 접했을 때 나는 왠지 불안정한 느낌이 들었다.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그림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어 그랬던 것이다.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그림을 읽으면 길 섶을 따라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레 그림이 흐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윈 버드나무 한 그루에 봄의 기운을 받은 잎들이 돋고 있다. 한 선비가 동자가 이끄는 나귀를 타고 가다 문득 길을 멈춰 버드나무 가지 위 꾀꼬리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는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다른 손으로 접는 부채를 쥐고 있다. 언덕과 길은 옅은 먹으로 바탕을 칠한 다음 초묵(焦墨)을 찍어 잡초를 여기저기 벌려 놓았는데 나귀 탄 선비와 종자의 모습은 가는 붓끝으로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그 길가 버드나무 위에서 꾀꼬리 한 쌍이 화답(和答)하며 노니는 것에 넋을 빼앗긴 채 서서 바라보는 장면을 사생(寫生)해 낸 그림이다. 꾀꼬리의 화답 장면과 넋 나간 선비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려는 듯 버드나무는 간결하게 처리하여 길섶 한 곁으로 몰아놓고 선비 일행을 큰길 가운데로 내세운 채 나머지는 모두 여백으로 비워둔 구도인데 그 여백 위로, 봄의 정적 위로 꾀꼬리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이 그림의 오른쪽 위에는 역시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던 이인문(李寅文)이 제화시(題畵詩)를 넣어 단원의 춘정에 화답했다.

 

꽃 아래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

악기 황(簧)의 천 가지 혀 소리를 내고

시인의 술독 앞에 두 알의 귤 보기도 좋아라

버들가지 사이 어지러이 오가는 저 꾀꼬리

안개와 비를 엮어 봄 강을 지어내었네

 

주말 오후 자전거 타고 나간 강변 길 가로수는 이제야 겨우 새순을 틔웠다. 그 여윈 가로수 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새 몇 마리가 지저귀고 있어 가뿐 숨을 멈추고 나무 가지 위를 올려다보았다. 새들은 단원이 그의 걸작 위에 영원히 붙들어 매어 놓은 꾀꼬리들이었을까? 주말 오후 봄은 멀어도 강물 위에 떨어져 일렁이는 햇살은 봄볕이었다. 그리고 먼 시공을 넘어 나의 마음에 새겨진 봄 그림을 남긴 단원과 그의 화우(畵友)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은 또 얼마나 멋진 사람들이었으며 우리 옛 그림은 읽어 얼마나 멋진 그림들인가?

'○ 아트 로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관음상  (0) 2020.01.16
옥인동 47번지  (0) 2019.12.13
박노수미술관  (0) 2019.04.01
미인, 아름다움의 역설  (0) 2019.03.12
영국 회화의 봄  (0) 2019.03.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