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같아서는 헐렁한 면 티셔츠, 면 바지 입고 편하게 일하면 좋겠는데 양복 정장에 와이셔츠 받쳐 입고 넥타이 메고 출근해야 한다. 그러니 주말이면 와이셔츠 다섯 개는 다려야 한다. 한때는 와이셔츠 다섯 개를 세탁소에 맡겨본 적도 있지만 그걸 맡기고 찾는 일이 번거롭기도 해서 내 손으로 와이셔츠를 다린다. 하지만 매주 와이셔츠 다섯 개를 다리는 일은 지루한 일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다림질을 하며 영화를 본다. 영화 한편 느긋하게 볼 여유조차 만만치 않은 팍팍한 일상에서 다림질 하며 영화 한편을 보는 일은 괜찮은 선택이다.

 

남자는 아마 조정(rowing)을 하는 체육 특기생이었던 것 같고 여자는 학교 조정팀를 응원하는 동아리 회원이었던 것 같다. 단순하고 우직하게 운동에 전념하는 남자는 여자가 보기에 매력적이 었을 것이다.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귀었는데 결국엔 채였다. 다른 여자에게 채인 남자는 홧김에 군대를 갔고 여자는 남자를 찾아 면회를 갔다. 동아리 동기생이 이제 겨우 짝대기 두 개 일병을 면회 갔으니 참 우정의 골은 깊었다. 오랜 만에 소주 잔 거나하게 걸친 두 동기생. 전방 산골의 시외버스 막차는 여덟 시에 떠나고 남자는 여자 동기생에게 막차 표를 끊어 주었다. 이 막차를 타기 싫었던 여자는 막차 시간이 다가오자 화장실로 숨어 버렸고 남자는 여자 동기생이 막차를 놓쳐 버릴까 좌불안석이다. 마침내 막차의 출발이 임박하자 남자는 떠나는 막차를 붙잡아 놓고 여자 화장실 앞에서 큰 소리로 여자 동기를 불렀다. 끝내 못이긴 여자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 막차를 탔다. 막차 안에서 여자는 책 사이에 끼워놓은 남자의 사진을 열어보고 울었다.

 

다림질을 하며 자막이 필요한 외화를 볼 수 없으니 그 시간에는 우리 영화를 볼 수밖에 없어 지난 몇 주간 몇 개의 우리 영화를 봤는데 영화의 반을 본 영화가 없었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라는 요즘 볼 만한 우리 영화가 없어서 최근에는 세계고대문명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몇 차례 보다가 오랜 만에 골라본 영화가 <사랑을 놓치다>였고, <사랑을 놓치다>는 오랜 만에 끝까지 다 본 영화가 되었다. 왜 그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다 보았을까? 연기자들의 연기도 별로 였고 기발한 시나리오 때문도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사실 영화는 맹송맹송 하기 짝이 없어서 내가 익히 보아온 뭇 멜로영화의 잡탕 같기도 했다. 그래도 굳이 이유를 꼽아야 한다면 오늘 봄이 무르익어 터지기 직전이기 때문일 것이고 그래서 내게도 분명히 찾아 들었던 먼 그 시절의 봄 날이 갑자기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때 사랑을 놓쳤던가? 그것은 잘 기억 나지 않지만 그 봄을 놓치고 나는 참 먼 길을 온 것 같기도 하다.


위 옛 잡문을 다시 포스팅 하려고 검색을 해보았더니, 영화는 2006년 작이고 나는 영화를 2007년에 보았던 것이며 당시 법적으로 기혼자였던 배우 설경구는 이혼을 하고, 2009년에 배우 송윤아와 재혼을 했다는 등의 정보를 얻었다. 2020년 송윤아의 인스타그램에는 한 네티즌이 “배우님 궁금한 게 있어요. 진짜 불륜 아니에요?”라는 댓글을 남기자 송윤아가 “…나쁜 일은 안하고 살아왔다…”고 답변했다고, ‘언론매체 마이데일리’가 이 천박한 해프닝을 ‘종합’ 기사로 다루었다. 참 대단한 네티즌이요, 대단한 언론매체이며, 대단한 종합기사, 대단한 대한민국이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며 2020년을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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