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영화 목록에서 우연히 “세상 끝과의 조우”(Encounters at the End of the World)라는 제목을보고 꽂혀 버렸다. 이런 제목이라면 누가 만든 어떤 영화 건 일단 봐줘야 했다. 영화 파일을 받는 동안 영화 정보를 훑어봤는데 세상의 끝, 남극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라 했다. 꼭 봐야 할 영화였다.

 

영화 시작과 함께 강한 악센트를 지닌 영어 나레이션이 시작됐다. 영화를 만든 헤르조그(Werner Herzog)감독 본인이 줄곧 나레이션을 이어간다. 헤르조그는 촬영감독 자이틀링거(Peter Zeitlinger)를 데리고 남극으로 갔다. 왜 남극이었을까? 화면을 타고 흐르는 나레이션을 통해 감독은 스스로 그곳에 펭귄 찍으러 간 것이 아니고 남극에 생업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남극 그 자체의 풍경을 담고 싶었노라 말했다. 감독은 남극 과학기지 이곳 저곳을 돌며 그곳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남극 바다 수중 촬영 화면을 장중한 음악과 함께 깔아 놓았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남극이라는 곳은 과학자들만 사는 곳은 아닐 것이다. 과학자를 먹일 조리사가 있을 것이고 과학자의 변기가 막히면 그것을 뚫어줄 기술공도 있을 것이다. 지붕에 구멍이 난 과학자의 집을 때워 줄 목수도 있을 것이고 과학자를 연구 지점에 데려다 줄 운전사도 있을 것이다. 헤르조그는 처음 이들을 화면에 소개하고 각 인터뷰이들이게 질문한다. 질문은 똑같다. 왜 ‘이 세상의 끝’까지 오게 된 것인지, 그리고 대답도 똑같다. 마치 내가 이런 질문을 위해 준비해둔 대답과 같이 세월 따라 흐르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게라고. 헤르조그감독의 뷰 파인더에 담긴 남극의 빙원, 화산 그리고 해저는 아름답고 또 장중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장중한 풍경 보다 더욱 내 시선을 끌고 내 마음을 부여 잡은 장면이 있었다.

 

세상의 끝, 남극을 닮은 동물학자가 한 사람 있다. 그는 남극에서 펭귄의 생태를 연구하고 있고 말을 걸지 않으면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남극 같은 사람이다. 헤르조그의 질문에 남극을 닮은 동물학자의 남극을 닮은 대답이 나오고 이어 헤르조그의 나레이션이 이어진다. 얼음으로 뒤덮인 바닷가에서 알을 품던 펭귄은 주기적으로 바다로 나가 배를 채워야 한다.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는 펭귄은 무리를 이루어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그런데 이 펭귄 무리들 중에는 바다도 아니고 그들이 무리를 이루어 서식하는 서식지도 아닌 거꾸로 남극 대륙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놈들이 있다. 방향을 인지하는 뇌의 신경체계가 잘못된 것일까? 과학자들은 어떤 펭귄이 무리를 이탈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유를 정확히 알 지 못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거기 있다. 이런 펭귄은 해안에서부터 수 십 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의 과학기지에서도 발견된다. 그 놈들의 길을 막고 방향을 돌려 놓아도, 그 놈들을 다시 서식지로 데려다 놓아도 한사코 녀석들은 바다가 아닌 반대쪽 남극 대륙 쪽으로 뒤뚱거리는 걸음을 옮기며 나아갈 뿐이다. 녀석들은 언제 잘못된 걸음을 멈추게 될까? 내 마음 속에서 출렁임이 일어나는 사이 녀석들의 가야 할 길은 수천 킬로미터 거리의 남극 대륙 쪽일 것이고 그 과정에서 결국 녀석들이 맞이하게 될 “세상의 끝”은 분명하다. 그래도 세상 끝을 보러 남극에 까지 달려간 사람들은 녀석들을 갈 길을 막아서도, 녀석들의 방향을 돌려놓아서도 안 된다. 그저 녀석이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IMDB에 이 영화에 대해 누가 남겨 놓은 코멘트처럼 영화의 전개는 난삽하고 그의 표현처럼 대체 뭔 말을 하려고 영화를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현까지 일리 있어 보인다. 그래도 이 난삽하고 아리송한 영화에 99분 동안 나는 전혀 눈을 떼지 못했다. 영화가 꼭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기이한, 장대한, 멋진, 혹독한 풍경이 있고 그 풍경을 기대고 살아가는 심드렁한 삶들이 있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한편의 영화가 되기에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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