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대형화면과 5 채널의 스피커로 영화 등을 감상할 수 있는 홈시어터(home theater)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는데 꼽아보니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대형화면으로 치던 크기의 텔레비전이 요즘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텔레비전 화면 크기일 뿐 더러 화질은 비약적으로 좋아졌고 실내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어수선한 케이블을 연결해야 했던 5 채널 스피커 시스템이 내던 음질은 요즘 작은 스피커 하나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기술 발전이 그야말로 눈부시다. 영화 꽤 즐겼던 나도 홈시어터 유행을 타고 없는 살림에 대형 프로젝터는 꿈도 못 꾸고 쌈짓돈 풀어 DVD 플레이어와 5 채널 스피커를 장만, 거실에 나름 홈시어터를 꾸몄다. 그렇게 홈시어터를 꾸미고 처음 구매한 타이틀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 1998)』 였는데 작렬하는 폭발음, 긴장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배경음악 그리고 등 뒤에 떨어지는 탄피소리까지 입체감 있게 재현되는 것을 듣고는 홈시어터야 말로 전쟁 영화 보기에 제격이 아닐까 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극장에서 먼저 본 후에 다시 DVD 타이틀을 구해다 집에서 본 것인데 탄환이 해변에 설치한 장애물에 맞아 '핑' 하고 튕겨 나오는 소리의 입체감은 아직 귓가에 생생하다. 이후 잘 만든 전쟁영화 DVD 타이틀이 출시되었다는 소식은 나를 들뜨게 해서 이를 구해 집에서 보는 것을 한 동안 즐거움으로 삼았고 그 중 『특전 U보트』(Das Boot, 1992)라는 독일 영화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특히 유럽지역에서 벌어졌던 전쟁은 수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 알려진 영화는 미국 영국 쪽 시각에서 독일을 상대로 싸운 내용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 가장 치열했고 엄청난 규모의 인명손실이 있었던 곳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미국 영국과 독일이 싸운 유럽 서부전선이 아니라 독일과 옛 소련이 전쟁을 벌인 동부전선이었다. 물론 많은 구 소련의 선전영화들이 만들어졌으나 냉전의 망령이 오늘날까지 어른거리는 이 땅에서 도저히 우리가 가까이 접할 수 있던 영화가 아니었다. 다만 『철십자 훈장』(Cross of Iron, 1977)이라는 영화가 독소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아주 오래 전 영화평론가 정영일씨의 소개로 명화극장을 통해 『철십자 훈장』이 KBS 공중파 전파를 탔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내게는 주인공 제임스 코번(James Coburn) '썩소'가 인상적이었던 『철십자 훈장』은 미국 서부활극의 거장 페킨파 감독의 명성만큼 그쪽 영화 꽤나 안다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독일과 소련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에 주인공 백전노병 독일군 슈타이너 중사가 영어로 대사를 하는 이상한 느낌은 내 기억에는 그리 좋지 않게 남아있다. 그 후 독소전의 전설적인 스나이퍼 대결을 그린 영화 『에네미 엣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 2001)도 국내 개봉되었는데 영화 속 소련군 스나이퍼 자이체프(Zaitsev)도 독일군 스나이퍼 콰니히(Konig)도 똑같이 영어로 대사를 하는데 재미있게 영화를 보면서도 어이없던 기억은 더 생생하다. 결국 영화들은 할리우드 자본과 시스템이 생산한 영화에 불과한 것이고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결국 미국의 시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군과 소련군을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 파도가 뱃전을 때리는 그 장쾌한 장면이 사실 영화를 연출한 피터센(Wolfgang Petersen) 감독의 주특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 영화가 짧은 기간 국내 상영관에서 개봉되었다는 기록도 봤으며 비디오로도 출시되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2시간 9분짜리 긴 영화가 우리 개봉관에서 환영 받기 어려웠을 것이며 우리 관객에서 익숙하지 않은 전쟁영화, 게다가 독일에서 만들진 제2차 세계대전을 그들 시각에서 해석한 영화가 매니아 층을 제외한 일반 관객의 호응을 얻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여담이나 고도의 심리극으로 완성도 높은 역사극으로 대접 받으며 1982년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특전 U 보트』의 감독은 이 때 얻은 명성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하여 『에어 포스 원』(Air Force One, 1997)과 같은 몇 흥행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세계 영화 산업의 1번지 할리우드의 감독이 된 피테센, 그러나 이후 한번도 『특전 U보트』와 같은 수준 높은 완성작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것이 세평이니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5.1채널로 다시 녹음되어 DVD 타이틀로서 다시 세상에 나와 나의 심금을 울렸으니 아직 이 영화를 감상하지 못한 영화 팬이라면 한번 보시기를 권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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