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에 본가에서 얼떨결에 분양해온 게발선인장은 이름도 이름이거니와 풀 죽은 잎사귀마냥 화분 바닥에 뻐드러져 퍼져있는 모양새가 영 못마땅했다. 그 모양새가 마뜩잖은 나로서는 버리고 싶었던 게발선인장 화분에 애착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현관 앞 자리에 놓아두려는 아내를 나는 막지 못했다. 이미 게발선인장에 꽂혀버린 아내를 누가 막을 수 있으랴. 그런데 며칠 전 게발선인장에 꽃이 활짝 피었다. 그 화분을 애지중지하던 아내는 아내대로 으슥해하고 나 역시 하찮게만 보이던 선인장에 붉은 꽃이 피었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으며 볼품없던 선인장이 달라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인장의 개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꽃이 떨어져 마침내 볼품없는 선인장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 꽃을 피우는 식물 중에 일년은 고사하고 보름 동안만이라도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종자가 얼마나 되던가? 그래서 꽃이야말로 지는 때가 있기에 아름답다는 고금의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게발선인장 꽃이 피고 지던 사이 나는 『김병종의 모노레터』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책 속 어느 구절에서 장년의 저자는 양수리이던가, 미사리이던가 어느 카페의 창가에 앉아 "젊음의 도심으로부터 밀려난",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이라는 "젊음의 노래"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청춘의 노래는 내게는 어른의 노래였고 이해할 수 없는 노래였다. 이제 나도 어른이 되어 오늘 꽃이 떨어져 다시 볼품이 없어진 게발선인장 화분 앞에 서서 지고 또 피는 혹은 피고 또 지는 꽃잎 같은 청춘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리고 옛 어른들의 노래를 허밍으로 불러보며 내가 그토록 마뜩지않아했던 개발선인장화분을 고집스럽게 현관 앞에 놓아 둔 아내의 생각이 따로 있지 않았을까 객쩍은 의심을 품어 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