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서, 박흥순, 1982, 서울시립미술관
2018. 6.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시대유감』(時代遺憾)이라는 주제로 걸린 전시 작품들을 관람했다. 2001년에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200점으로 구성된 가나아트 컬렉션을 소개하는 두 번째 전시라 한다. 세상이 흉흉해도 좋은 일 하는 분도 많다. “80년대 시대의 복판을 살아가는 미술인 한 사람에게 주어진 당연한 책무”로서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을 지원했다는 이호재 대표의 회고처럼 이호재 대표가 기증한 200점 작품 중 160여 점은 이른바 민중미술 작가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시대성을 구현한 미술로 평가 받고 있다 한다. 작품들이 그리는 1980년대에 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쳤으나 그때만 해도 민중미술과 나는 한 줄기 인연도 없어서 그 민중미술이란 것이 학생회관 건물 전체를 덮는 시뻘건 걸게 그림이려니, 당시 운동권이라 불리는 학생들이 돌려보던 책 속, 표지 그림으로 담긴 판화 같은 것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니 그로부터 30년 세월을 건너 뛰어 어제와 내 눈 앞에 놓인 80년대의 민중미술 작품에 대해 내게 각별한 유감이 있겠는가? 그렇게 대충 전시작품을 둘러보는데 전시를 소개하는 판넬벽 사이 멀찍이 권투선수가 상대로부터 결정타를 얻어 맞고 링 바닥에 쓰러지는 장면을 포착한 작품 하나가 눈에 들었다. 그 작품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김득구’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82년 26살 청년 김득구는 세계프로권투협회 WBA의 라이트급 참피온 타이틀에 도전하기 위해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갔다. 김득구가 상대한 참피온은 미국인 레이 맨시니(Ray Mancini), 권투선수로서 둘의 이력차이가 완연해서 경기 결과 역시 맨시니의 우세를 점치는 관측이 많았으나 1980년 군사정권이 베푼 시혜의 결과 컬러 TV로 전국에 방송된 김득구와 레이 맨시니와의 경기 중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우리 김득구 선수가 정신력으로 버텨낼 것이라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적지에서 그것도 고기 먹고 자란 맨시니를 상대로 풀 먹고 자란 김득구는 9회까지 대등한 접전을 펼쳤다. 이대로 15회까지 끝내고 판정으로 간다면 어쩌면 이길 수도 있다는 실낱 같은 이제야 생각해보니 안쓰러운 희망은 그 경기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어린 나만 품고 있던 희망이었을까? 10회 접어들자 체력이 떨어진 기미가 완연했던 김득구는 맨시니에게 난타 당했고 그 가운데서도 정신력으로 버텨내던 김득구는 14회 맨시니에게 턱을 강타 당한 후 링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경기는 맨시니의 KO승 김득구는 경기 후 끝내 일어서지 못하고 뇌출혈로 병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정신력으로 싸우다 맞아 죽었다. 김득구는 경기를 위해 미국으로 출발하면서 "관을 준비해놓고 간다.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다. 김득구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복서」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을 보며 내게 그 시대에 대한 유감이 있다면 바로 1956년 생 이름 얻을 득(得) 아홉 구(九), 김득구가 복서로 살다가 링에서 정신력으로 버티다 맞아 죽은 시대에 대한 유감이겠구나, 잠시 무거운 마음을 안고 다음 전시실로 발걸음을 돌리려다 작품 옆에 붙은 라벨을 보니 박흥순이라는 분의 1982년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