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중에 요리사 박찬일의 신간 『오늘의 메뉴는 제철 음식입니다』를 읽었다. 책에서 저자는 여름 제철 식재료로 전복을 소개하면서 불도장이라는 음식을 언급했는데 대표적인 중국 보양음식으로 호텔 중식당에서 한 그릇 10만원이나 한다는 고급 음식을 아주 오래 전 직장 생활 초년 시절에 나도 한번 맛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 고위 임원과 거래처 고위 임원간의 접대 식사를 실무자인 내가 소위 어렌지 하게 되었는데, 그 고위 임원의 비서에게 전화를 받기로 그 분이 불도장을 좋아하시니 접대 메뉴에 꼭 불도장이 들어가는 중식 세트를 시켜야 한다는 언질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고급 중식당 룸의 말석에 앉아 난생 처음 불도장이라는 음식을 맛보게 되었는데 음식 보다는 받침접시까지 딸린 고급스러운 자기 용기가 눈에 들었고 조심스럽게 떠먹어 본 불도장 맛은 온갖 고기를 쌍화탕에 재여 놓았다 끓여낸 맛과 같았다. 아마 그 불도장이라는 음식을 떠먹으며 당시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과 롯데백화점 본점 건물을 연결하는 지하 입구 롯데리아에서 팔던 프라이드 치킨이 불도장 보다 더 맛있겠다는 생각을 했던가,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불도장과 롯데리아 치킨을 동시에 떠올리니 어쩌면 내가 소위 출세를 하지 못한 이유가 그 접점 어디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치 박살 난 바둑 복기하듯 지난 직장생활을 언뜻 되돌아 보니 나도 그 출세라는 것을 해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불도장 앞에서 프라이드 치킨 생각하듯, 살바토레 페레가모 허리띠를 찬다고 바지가 안 흘러내리는 것도 아니요 이마트 허리띠 찬다고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도 아니며, 불도장 먹었다고 포만감에 허리띠 풀 일도 없고 팍 삭아 터진 갓김치에 돼지머리 고기 싸먹었다고 배고픔에 허리띠 조일 일 없는 것 아닌가, 늘 그런 생각을 품고 직장생활을 해왔으니 출세하기에는 애초에 글렀던 것이다. 요컨대 나는 그 출세를 통하여 얻게 될 어떤 것들에 별 관심이 없었을 뿐 더러 회사에서 처리하는 업무, 그 성과는 내게 말 그대로 생업(生業)이요 호구지책(糊口之策) 그 자체였을 뿐이다. 생업과 호구지책이란 얼마나 엄정한 말인가? 그마저도 내게는 쉽지 않았다. 하물며 그것을 너머 출세를 이루어 내는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가?
하지만 이제 자영업자이거나 백수이거나 - 돈 많은 백수는 제외 - 둘 중 한 부류로 남아 버린 아는 동년배들 사정을 생각하니 빗질로 아무리 쓸어도 쓸어도 쓸려 나가지 않는 시멘트 바닥에 딱 붙어버린 젖은 낙엽처럼, 회사에 딱 붙어서 아직도 월급 따박 따박 타 먹고 살아가는 지금 내 처지를 가여워할 일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괜히 불도장 때문에 잡 생각만 늘어 어지럽다, 읽던 책이나 다시 읽자 했다. 역시 이 눈부신 멀티미디어 시대에 먹방만큼 사람을 흥미롭고 즐겁게 하는 소재가 없는 것이고, 노안 때문에 그 눈부신 멀티미디어를 만끽하지는 못하지만 후회, 걱정, 근심, 시름 같은 것은 책갈피 속으로 잠시 구겨 넣어버리고, 제철 음식을 소개하는 책 읽는 순간 만큼은 흥미롭고 또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