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김유경 저/하지권 사진 "서울, 북촌에서"
지난 겨울 서울은 참 추웠고 많은 눈이 내렸다. 추위와 눈 때문에 한동안 자전거 타기를 즐기지 못했고 대신 겨우 내 인왕산과 북악산, 효자동과 삼청동, 성북동 더러는 북한산 자락 평창동과 구기동 일대를 순서를 바꿔가며 걸어 다녔다. 요즘 손에 쥐고 있는 『서울, 북촌에서』라는 책이 소개하는 동네다. 굳이 순서를 이야기 하자면 책이 있어서 그 동네를 걸어 다닌 것이 아니라 그 동네를 걸어 다녔기 때문에 책 제목이 내 눈이 든 것이리라.
인생 뭐 있냐는 흔한 말, 내 사는 꼴도 그렇고 내가 보는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도 그렇다. 늦은 깨달음인지 여전한 착각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인생 뭐 없다 느껴지듯 책이 다루는 대상과 주제도 뭐 있겠냐 싶다. 저자가 책 속에 옮겨 놓은 서울 북촌의 한자리, 오늘날 행정 이름으로 성북동 골짜기 깊은 곳, 쇠락한 왕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한옥 처마 아래서 날렵한 추녀 끝에 걸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 들 새로운 의미가 덜컥 내 가슴에 내려앉을 리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데 이 책,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이 즈음이면 내 글이 아무리 조악한 잡문이기로 책에 대해 한 마디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책 속 피맛골 열차집 풍경은 이랬다.
두 젊은이가 들어와 빈대떡 한 접시를 시키고 이야기도 하고 젓가락 씨름도 하며 웃곤 했다.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떠나간 젊음이 거기에 있다. 박인환의 시처럼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듯하고 젊음과 중년과 장년의 서정, 왁자지껄함이 그대로 꽉 차있는 공간이다. 옆자리에는 부동산 이야기부터 형이상학적인 내용까지 들려온다. 왁자한 소리들로 열띤 분위기를 내는 가운데 모든 계층이 어울려 있다.
책이 다루는 공간은 서울 북촌, 머리에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안국동, 계동, 삼청동, 효자동, 부암동, 성북동 등등, 거기에 이 동네들이 등지고 혹은 쳐다보고 있는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 자락들이다. 거기에 남은 어느 화랑, 어느 한옥, 어느 골목, 어느 계곡들에 관한 이야기들인데 어느 건물이 잘 지은 건축물이고 어느 골목이 과거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골목이며 어느 계곡이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더라는 이야기이리라 짐작하였지만 아니었다, 책은 계곡과 동네 골목을 밟고 다니던 발길, 건물의 문고리를 잡던 손길들에 관한 격 있는 여성이 조근조근 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그 목소리는 발랄함을 앞세우지도 정연한 논리로 날을 세우지도 않는다. 애써 귀 기울여야만 들리는 그럼에도 하고 싶은 말 다 담고 있는 그런 목소리, 누구의 것일까?
책의 광고 문구는 “5년의 저술, 20년의 취재, 그리고 600년의 이야기”다. 책을 열면 낡은 책을 펼치는 순간 코 끝을 자극하는 곰팡내가 날 듯 하지만 유행에 충실하게도 수준 높은 사진을 곁들여 보는 눈도 즐겁다. 다만 글을 앞세우고 사진을 뒤로 슬그머니 밀어놓은 데에는 저자의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요즘 사람들은 입체적으로 느낀다. 그러므로 글에 밀린 뒤 페이지 사진들을 먼저 본 다음 글을 읽으라 권하고 싶다. 이 점에서 분명 저자와 나는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사진을 먼저 두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이 책에 뭔가 있다고 느낀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사진을 먼저 보고 다음에 글을 읽고 싶어하는 요즘 독자와 글을 먼저 두고 사진을 뒤에 배치한 저자와의 균형, 단행본 치고는 두꺼운 책을 지하철 안에서도, 늦은 밤에도 정독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드물기는 하지만 책을 읽으며 저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책 표지 안쪽에 옮겨놓은 저자의 약력을 근거로 유추하기로 저자는 여든을 바라보는 노부인이리라. 저자를 본 들 주변머리 없는 내 성격으로 무슨 말을 드리고 또 그 분의 말씀으로부터 무슨 의미를 담아올 수 있을까 만은 책을 읽고 저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그것도 좋은 책을 읽는 즐거움 아닐까? 그리고 그 책이 서울다운 어떤 것을 발견해내는 훌륭한 가이드 북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지난 겨울 북촌을 거닐던 내 발길은 봄에 다시 자전거를 몰고 한강변으로 내달리겠지.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북촌까지 자전거길이 열리는 그런 상상을 해본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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