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 │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르 앞에 선 에스더 │ 1620년 │ 런던 코톨드갤러리

Peter Paul Rubens, Esther before Ahasuerus,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UK

2013. 4. 23.

 

유럽 여러 유명 미술관에 가면 빠지지 않고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이 루벤스의 컬렉션이다.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루벤스를 위해 아예 전시실을 따로 꾸몄구나 싶을 정도였다. 화가 하면 떠올리기 쉬운 춥고 배고픈 이미지와 루벤스와는 전혀 상관 없었다. 그는 유럽의 여러 왕실과 고관대작, 대 사원들이 주문한 그림을 그려서 큰 부를 쌓았고 유럽 여러 왕실 고위층들과의 인맥을 발판 삼아 심지어는 왕실 지정 거간꾼, 점잖게 말해 외교관으로 행세하거나 활동하기도 했다. 아내를 잃은 후 쉰 셋에 열 여섯 살 미녀를 후처로 들여 그녀를 모델로 한 걸작을 남겼으니 또한 대단한 정력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공평하게 모든 사람들이게 똑같이 주어지고 아무리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 한다 해도 한 사람이 작업할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오늘날 유럽의 여러 고궁과 미술관, 사원에 무수히 남겨진 그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대체 어떻게 이 많은 작품들을 한 사람이 그릴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마련이다. 오래 전부터 인쇄물로 혹은 미술관 등에서의 전시 작품으로 루벤스의 그림을 많이 접해 왔음에도 나는 루벤스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루벤스 다작의 비밀을 우연히 책을 통해 알게 된 후부터는 그의 작품을 더욱 외면하게 되었다. 나의 외면과 상관없이 루벤스는 당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대접받았고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 직업 화가들을 고용했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아예 그림공장을 차린 셈이다. 그는 주문 받은 그림의 밑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작은 크기의 습작을 먼저 그린 다음 대부분의 작업을 고용화가들에게 맡기고 작품의 마무리 단계에 스스로 살짝 손을 더한 후 서명을 기입하는 방법 등으로 쏟아지는 주문들을 감당해갔다. 이렇게 그려진 작품들은 루벤스의 작품일까 아닐까? 이 비밀 아닌 비밀은 당대에 그의 작품을 구매해간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인기 화가였기 때문에 '루벤스의 그림공장'에서 그려진 그의 작품을 위작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루벤스는 위대한 화가였을 뿐 아니라 그림 사업을 운영한 훌륭한 비즈니스 맨이기도 했으니까.

 

런던 코톨드 갤러리는 역시 성공한 비지니스맨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세멸 코톨드(Samuel Courtauld)가 사 모은 회화 작품들을 기반으로 설립된 사설 갤러리이다. 한 개인의 소장품을 바탕으로 한만큼 소장 작품의 수에 있어서는 제한이 있을 수 밖에 없지만 세잔, 드가, 마네, 모네, 고갱 그리고 고흐 등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수준에 있어서 만큼은 대형 갤러리에 버금가는 컬렉션을 자랑한다. 그런데 이 코톨드 갤러리에서조차 뜬금없이 루벤스의 그림이 전시실 한방에 거의 가득 차 있어서 과연 루벤스의 공장 작품들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 공장 그림들 중 내 눈길을 끌던 그림이 있었는데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르 앞에 선 에스더」(Esther before Ahasuerus)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거침없는 구도와 반대로 아래로 흘러 내리는듯한 역동적인 필선, 황금색이 주조를 이루는 우아한 색감은 공장 그림이라는 그간의 루벤스 그림에 대한 내 폄하가 무색하게도 대가의 작품다운 면모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보다 큰 대작을 그리기 위한 습작으로 남긴 그림으로 짐작되는데 지금껏 내가 본 루벤스의 어느 작품보 더욱 훌륭한 루벤스의 걸작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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