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hua Reynolds, Cupid and Psyche, Courtauld Gallery, London, UK
죠수이 레이놀즈, 큐피드와 푸시케, 1789년 경, 런던 코톨드갤러리
2013. 4. 23.
큐피드(Cupid)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인데 날개를 달고 사랑의 화살을 장난 삼아 이리저리 쏘아대는 어린 아이 모습으로 고전 미술에 곧잘 등장한다. 한편 같은 신화 속 프시케(Psysche)- 영어 발음으로는 사이키 -는 미모의 공주로 큐피드의 연인이다. 나는 늘 큐피드와 프시케가 서로 연인이라는 설정이 어색하다 생각했다.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어린 아이 모습의 큐피드가 어떻게 성인인 미모의 공주와 '사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설정이 가능하니까 신화라고 한다면 더 할말은 없다. 이렇게 큐피드와 프시케가 서로 연인이라는 설정이 어색하다 싶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지 프랑스 고전파 미술의 거장 다비드(Jacques Louis David)는 1817년에 복근이 팽팽한 젊디 젊은 난봉꾼의 모습으로 벌거벗고 잠든 프시케 옆에, 그러니까 상황 이미 다 끝난 후에 헤벌쭉 미소를 날리며 앉아 있는 큐피드를 그렸는데 이 그림조차도 내가 보아왔던, 그래서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큐피드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어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비드의 그림 속 큐피드는 흰 날개만 살짝 지워버린다면 느끼한 카사노바의 모습이지 아무래도 큐피드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런던 코톨드 갤러리(Courtauld Gallery)에서 프시케의 연인으로서 어린 아이 큐피드와 젊은 난봉꾼 큐피드의 간극을 절묘하게 메우는 재미있는, 내 눈에는 절묘해 보이는 작품을 보고 사진으로 남긴 것이 있어서 잡문 몇 자 남기려 한다. 이 작품은 영국 화가 죠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의 1789년 작품으로 역시 큐피드와 프시케라는 같은 제목이 붙어 있다. 신화에 쓰여진 대로 프시케는 어둠 속에서 등잔불을 밝혀 잠자는 큐피드를 보고 있는데 그림을 아무리 자세히 봐도 프시케가 보고 있는 것은 큐피드의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흡사 조혼(早婚)이 흔하던 시대 꼬마 신랑에게 시집을 간 색시가 잠든 꼬마 신랑의 옷을 벗기고 언제 여물지 기약도 없는 꼬마 신랑의 고추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 그 모습이라서, 그리고 프시케가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는 등잔불은 프시케의 긴 한 숨에 훅 하고 꺼져버릴 것만 같아서 작품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헛웃음을 실실 날리고 서 있었다. 내 옆을 지나치던 다른 관람객들은 아마도 그런 내 모습이 실 없어 보여 헛웃음을 지었을지 모르겠다.
다비드, 큐피드와 푸시케, 1817년, 미국 클리브랜드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