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귀에 붕대를 두른 자화상, 1889년, 런던 코톨드갤러리

Vincent van Gogh,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2013. 4. 23.

 

1890년, 만 서른 일곱 살에 고흐(Vincent van Gogh)는 총을 쓴 자살로 삶을 접었다. 무엇이 그를 자살로 내몰았을까? 서른 살에 화가로 입문한 후 사망할 때까지 무수한 작품들을 그렸지만 살아 생전 그는 작품들을 거의 팔지 못했고 생활비를 전적으로 회화 중개인으로 일하던 동생 테오(Theo van Gogh)에게 의존해야 했다.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좌절감에다 동생에게 얹혀살다시피 한 생활고 역시 그를 비참한 처지로 몰고 갔을 것이다. 다른 한편 고흐는 잦은 발작에 시달렸는데 악성빈혈로 추정될 뿐 고흐가 앓은 정확한 병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연대기를 읽다 보면 그가 심한 치통으로 고통 받았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의학이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던 19세기 말에 고흐가 치통으로 겪은 고통을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게다가 고흐는 일신을 스스로 잘 돌보지 못하고 술과 담배, 매춘을 일삼는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 안 아픈 게 비정상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로 내몰았을 것이고 게다가 고흐는 이 불안한 심리 상태를 이기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자해를 일삼았다.

 

1888년 고갱(Paul Gauguin)과 함께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생활하던 고흐는 고갱과 심하게 다툰 다음 면도칼로 스스로 귀를 잘랐다. 피가 철철 흐르는 귀는 붕대로 묶었으며 잘린 귀는 종이에 싸서 고흐와 고갱 둘 다 자주 들리던 매춘부에게 줬다. 다음날 아침 의식을 찾지 못한 채로 발견된 고흐는 병원에 입원했으며 잘린 귀가 병원으로 전달되었지만 접합 수술을 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물론 이 사건을 계기로 고갱은 고흐 곁을 떠나 줄행랑을 치고 말았으며 몇 달 뒤 동네 주민들이 미치광이와 같이 살 수 없다며 경찰에 탄원서를 내는 바람에 아를 생활도 막을 내려버렸고 고흐는 생레미(Saint-Rémy)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고흐가 귀를 자른 후 아를에 머문 몇 달 동안 휠리스 레(Félix Rey)라는 의사가 고흐를 돌봐 주었는데 이 의사는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고흐를 정성을 다해 치료해주었고 고흐는 감사의 표시로 의사의 초상화를 그려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휠리스 레는 이 초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자기 닭장 수리하는 판자로 써 버렸는데 이 닭장 판자는 기적적으로 고흐의 작품으로 살아 남아 2016년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에 전시되었으며, 전시 당시 미화 5천만달러, 우리 돈 600억원 정도의 가액으로 감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이 고흐는 스스로 귀를 자른 뒤 붕대를 묶은 자진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몇 점 남겨 놓았다.

 

이 글은 지난 해바리기 포스팅 때문에 옛 글들을 다시 읽다가 마침 런던 코톨드갤러리에서 직접 사진으로 담아온, 아를에서 귀를 자른 뒤 스스로 그린 고흐의 초상화가 생각나 남기게 되는 잡문이다. 누가 연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꽃이 진창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라 했는데 고흐의 일상이야말로 바로 그 진창 속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과 다름 없고 그가 그려낸 작품은 그 진창 속에서 피어난 연꽃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고흐, 의사 휠릭스 레의 초상, 1889년,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

Gogh, Portrait of Doctor Felix Rey, The Pushkin State Museum of Fine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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