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오래 전에 읽은 『친일파 99인』이라는 책 때문이다. 그때는 미술에 관심이 덜했고 친일문제에 대해서도 세론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읽은 책이었음에도 책을 읽는 동안 몇몇 인물들의 친일 행각은 도가 지나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 분개하던 기억이 새롭다. 특히 김기창이 그린 섬세하고 화려한 채색화를 눈 동냥으로 보며 그를 한국화의 대가로 알았기 때문에 그가 제국주의 일본이 전쟁의 패망으로 치닫던 1940년대 전반 한국인의 전쟁참여를 선동하는 선전화를 그렸다는 사실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김기창은 1943년 매일신보에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라는 삽화를 실었는데 이 그림은 일본 왕이 내리신 입영통지서를 받고 제국주의 일본군에 입대하려는 아들의 좌우로 갓 쓰고 저고리 입은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배치한 수묵 소묘풍 삽화이다. 입대하는 아들의 비장한 표정 아래에는 '축 입영(祝 入營)……'이라는 어깨띠마저 드리워져 있다. 이는 1943년도부터 시행된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징병제도를 선전하기 위한 작품으로 종군하게 되어 감격스러운 듯한 학병의 진지한 표정과 장한 아들을 굽어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선전효과를 높이려는 의도가 다분히 베어 있다. 게다가 당시 김기창 그림의 특징으로 생각했던 세밀한 묘사와 화려한 채색의 독특한 한국화풍이 실은 운보의 스승이자 대표적 친일제 부력화가였던 김은호(金殷鎬)로부터 계승한 일본화 채색법에 영향이었다는 것은 내게는 제법 충격이었다.
다른 일제 부력자들이 그랬듯 김기창 역시 해방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또한 발군의 정치적 역량을 과시하며 한국화단의 으뜸으로 대접받아 왔고 1971년에 그가 제12회 3·1 문화상을 수상하고 그 이듬해에는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은 무슨 코메디같다. 더구나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예술가에게 주는 주요 훈장을 두루 수여 받았음은 물론이거니와 다가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일본의 괴뢰정부였던 만주국 장교로 종군한 바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치하에서 관급으로 발주되는 역사 기록화를 많이 그렸는데 의병장 조헌, 을지문덕과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신라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 영정들이 그것들로 이는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 받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으며 그 중 압권은 현재 한국은행 1만 원권 지폐에 그려진 세종대왕의 영정 또한 김기창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진전과 함께 역사 인식에도 많은 발전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으니 2001년 김기창이 사망하자 그 전 해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의 사망 때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뛰어난 예술가로서 또한 장애를 극복하고 많은 자선을 실천한 그의 삶의 이면에 그늘진 친일제 전력이 사회적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느 방송에서는 생전 그의 인터뷰를 녹화해두었던 장면이 재방영 되었는데 그가 스스로를 변호하던 요점은 청각장애로 인한 언어장애자로서의 힘겨운 삶과 역사적 격변에 휘말린 한 개인으로서의 역사인식에 관한 한 눈 뜬 장님일 수밖에 없었던 자기 변명이었으니 차라리 자신의 친 일제 부력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침묵으로 남겨두는 양심의 말미나마 보여주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몇 해 전에 『친일파 99인』을 엮은 민족문제연구소 주최로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전시체제와 민중의 삶'이라는 이름의 친일제 미술전시회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서 개최되었으며 여기에 그 이름도 섬뜩한 1944년의 '결전미술전람회'에 제출된 김기창의 미공개 친일 그림이 함께 공개되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김기창보다 두 해 전, 1912년에 대구 태어나 당시 조선총독부, 곧 일본정부 기관의 주체로 열리던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이른바 선전을 통해 활동하였으며 1950년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화가 이인성(李仁星)이라는 이름을 자연스레 떠올랐다. 몇 달 전에 읽은 책 속에서 알게 된 이인성의 충격적인 사망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인성은 동양화에서 입지를 굳힌 김기창과는 달리 일제 식민지 시대 대표적 서양화가로 이름을 얻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김기창과는 달리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오늘날 초등학교인 보통학교 졸업이 공식 학력의 전부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빼어난 재능을 보여 한국과 일본의 비공식 미술양성기관에서 수학하며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었으니 선전(鮮展)의 입선도 김기창보다 두 해 먼저인 1929년이었으며 이후 12점의 입선작과 6점의 특선작을 내는 기록을 세웠고 전일본수채화회전, 제국미술원전에서도 상을 받았다. 1936년에는 귀국하여 선전 추천작가 · 심사위원을 지냈으니 해방 전의 활동만으로 따지자면 김기창에 전혀 뒤지지 않는 활동을 보인 것이다. 해방 뒤에는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강의했는데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6.25 전쟁의 와중에 이런 저런 이유로 죽거나 납북되거나 실종되는 혼란 통에도 이인성은 살아남아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에 계속 교편을 잡게 되었지만 1950년 11월, 어느 날 경찰과의 사소한 시비 끝에 그 경찰에 총에 맞아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다. 이 죽음의 장면은 소설가 최인호에 의해 글로 소개된 후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치안대원과 이인성이 술집에서 사소한 시비가 붙어 감정 싸움으로 격화되었다는 다른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불의의 사고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최인호는 이인성의 죽음에 대하여 '해방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림 그리는 환쟁이는 치안대원의 자존심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라고 썼다. 뛰어난 예술가를 치안대원의 자존심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척박한 우리 현대사가 이인성을 죽인 것에 다름 아니었다는 평가였던 것이다.
한국의 고갱, 한국의 세잔이라고 불리며 한국적 인상주의를 토착화시킨 천재 화가 이인성, 그렇게 서른 아홉의 나이에 비운에 가버린 이인성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공간, 6.25 전쟁이라는 민족사적 격랑의 와중에서 보기 드문 걸작을 남긴 좋은 화가로 재발견되고 있다. 비록 서양화가였으나 그가 남긴 그림들의 단편만을 보더라도 그가 한국 수묵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는 사실을 쉬 감지할 수 있으며 아마도 이런 감성이 후일 이른바 이인성류로 분류되는 한국적 인상주의로 뿌리내리고 후대의 화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비록 식민지 정부의 관변 미술 전람회를 통하여 두각을 나타낸 한계가 있음에도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신 사람으로 그런 제도적 관행을 거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화가로 입신할 수 있었겠"으며 "요즘처럼 화랑이 많아 개인전을 통해 자신을 알릴 형편"도 아니었다는 유족의 항변도 가벼이 들리지 않는다. 한국 고미술 연구가였던 일본인 시라카미 쥬요시(白神壽吉)의 주선으로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했던 이인성. 그럼에도 이인성이 일제에 적극 부력을 하였다는 증거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86세까지 장수하며 갖은 찬사와 영예를 얻은 김기창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더욱 안타깝게 그려지는 화가가 이인성이다.
이상하게 시절이 수상하면 항상 친일청산 문제로 세상이 시끄럽다. 개인적으로 이 친일 청산의 총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각론에 이르면 많은 이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예를 한가지 들자면 용어정의가 불명확하다는 점이다. 청산의 대상은 분명히 '제국주의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 부역자 혹은 그 행위'이겠으므로 마땅히 '친일제(親日帝) 청산'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친일제가 아니라 친일(親日)이 문제가 되는 오늘날 우리 현실에 대하여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생각이 대세라는 점이 또 염려스럽다. 1999년에 대구시와 미술협회 대구지회는 이인성의 작품 세계와 그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이인성 미술상’을 제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인성의 일제 강점기 작품활동과 행적을 놓고 친일적 색채를 보였던 화가의 이름을 딴 미술상의 제정은 불가”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하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1940년대에 그려진 두 화가의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리고 이후 그 두 화가가 그린 인생의 궤적을 집어 보면 과연 우리가 청산해야 할 "일제의 잔재"가 어느 쪽에 있는지 너무도 쉽게 드러나는 것을 21세기에도 청산되지 못한 '일제(日帝)'를 두고 친일만 흠잡는 꼴이니 내가 우리들의 '친일청산'문제를 다른 시작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해당화 │ 이인성 │ 1944 │ 리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