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티소, 10월, 1877, 몬트리올미술관

James Tissot, October, Montreal Museum of Fine Arts

 

나는 저 나무를 수목 울창한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보았다. 봄에 키 큰 나무들은 새순을 가지 사이사이 내놓아 봄볕을 듬뿍 머금고 연두빛으로 대기를 물들이고 여름이면 너른 나뭇잎으로 가시 사이사이를 빽빽히 매워 나무 아래 대단한 그늘을 드리웠고 가을이면 바람에 마른잎을 후두둑 후두둑 떨어 뜨렸다. 겨울에 헐벗은 저 나무는 큰 키로 우두커니 서서 다시 봄을 기다렸다. 그리고 저 나무의 가을을 제임스 티소(James Tissot)의 그림에서 봤다. 아름다운 여인이 저 나무가 흩어놓은 낙엽을 밟으며 나무 아래로 걸음을 옮기는 그림이었다.

 

제임스 티소는 19세기말 인상파 화가들이 일약 세상을 풍미하던 시절 프랑스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화가다. 1871년 영국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름도 자크(Jacques)에서 같은 뜻의 영국식 이름 제임스로 바꿨다. 티소는 회화 기법에 있어 내가 아는 최고의 테크니션이다. 그러나 테크닉으로 감동을 살 수는 없다. 기예와는 차원이 다른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런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London)에서 티소의 작품을 봤던 것으로 기억하나 그 상세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영국에 가기 전 『화가와 모델』이라는 책 표지에 등장한 「10월」이라는 티소 작품이 지금 기억에 남아 있다. 가을, 저 나무 아래로 걸음을 옮기는 여인은 캐슬린 뉴턴(Kathleen Newton)이라는 여자다. 티소는 캐슬린을 모델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회화사에서 화가보다 모델이 더 유명한 사례를 꼽자면 티소와 캐슬린을 반드시 꼽아야 하리라. 둘의 절절하고 슬픈 사랑은 지금도 기사로, 책으로 많이 소개되고 있지만 먹고 살기 고달파서 절절하고 슬픈 사랑 따위 나를 전혀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저 그림 속 저 나무의 가을만 선명할 뿐.

 

어제 오전 사무실 공기가 너무 갑갑해서 잠시 사무실을 벗어나 회사 빌딩 아래 서 있었는데 머리를 드니 저 나무가 서 있었다 몇 해 전 회사 빌딩 조경을 단장하면서 심은 나무이리라. 오래 전 아파트 단지에서 처음 본 저 나무, 티소의 그림 속에 있던 저 나무 그리고 어제 내 머리 위에 봄볕을 머금고 봄 바람에 큰 잎을 파르랑 거리던 저 나무가 올 가을 낙엽을 흩어놓는 것을 보겠지. 돌이켜보면 내게 참 익숙한 나무인데 나는 아직 저 나무의 이름을 모른다. 이 나이 먹도록 세상 사는 이치를 몰라 헤매는 것 처럼.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척 하며 살아온 세월처럼.


 

위 글은 2016년 가을에 쓴 것이고 나는 저 나무가 마로니에라는 것을 2023년 올 가을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그 마로니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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