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간을 매운 봄볕은 화가의 정수리에 떨어져 어깨 위에 내리고 이젤을 타고 올라 캔버스를 넘어 화가의 네칸 모옥 부엌 문간으로 밀려 든다. 세상을 채우는 봄볕의 눈부심에 부엌 앞에 가없이 서 있는 고목의 그림자마저도 제 빛깔을 잃고 눈 부시다. 저를 닮은 황토를 요로 깔고 세상 미물에게조차 차별 없이 비추는 봄볕을 이불로 덮었으니 백구도 봄에 취해 늘어져 간혹 한 쪽 귀만 쫑긋 세울 뿐이다. 봄의 기척은 개에게도 들리나 보다. 이 찬란한 봄의 고요를 깨는 것은 햇살 아래로 조심스레 부엌 문간을 열고 걸어 나오는 화가의 어린 둘째 딸 금희의 붉은 옷이고 그 옷을 입힌 어린 딸을 바라보는 아비의 마음이며 또 아비인 화가의 눈길이다. 1935년 척박했던 그 시대 이 땅에도 이토록 화사한 봄볕이 쏟아져 내린 줄 화가의 그림이 아니었던들 어찌 알 수 있을까? 한 폭 그림으로 봄은 내게 찾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