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경복궁 옆 인왕산 아래 서촌(西村)에 체부동잔치집이라는 상호를 가진 분식집이 있다.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출발해서 시계방향으로 북악산을 넘어 삼청동 쪽으로 내려오거나 반 시계방향으로 인왕산을 넘어 독립문 쪽으로 내려오는 주말 가벼운 산행길에 가끔 요기하러 찾아가는 집이다. 나름 맛집으로 알려진 곳인 듯 허름한 가게 벽면에는 이름이 알려진 여러 유명인사들의 친필 사인들이 가득한데 얼마 전 그곳에 들려 주문해둔 칼국수를 기다리며 그 친필 사인들을 가만 쳐다보니 정치인들의 이름을 적지 않았는데 이게 뭔가, ‘아니 저 여자가  왜? 주문해둔 칼국수 맛 확 떨어지게.’ 내 평소 ‘반반하다 속지 말라 대가리에 똥만 찼다’며 혐오하기에 거리낌 없는 현직 정치인 이름이 보여 차마 눈 뜨고 못 보겠다며 고개를 돌렸더니 액자에 담은 한자 서예 작품 하나가 눈에 들었다. 가게 손님들 중 그 뜻을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지 누가 액자 아래에 작품을 설명하는 한글 설명이 붙여 놨는데 글자는 점어상죽(鮎魚上竹)이고 점어는 메기를 뜻하며 메기가 대나무 위에 오른다 하여 각고의 노력으로 뜻하는 바를 이룬다는 고사성서라 한다. 한자 네 글자와 함께 액자 속에는 오동나무 집, 오헌(梧軒)이라 호를 쓰는 민찬기(閔璨基)라는 글 쓰신 분 이름과 그 낙관이 찍혀 있었고 작품을 찬찬히 살펴 보자니 뜻이야 그렇다 치고 자못 그 글자의 생김새가 오묘했다.

 

그 서예작품을 본 때문이었을까?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을 책을 고르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山崇海深)라는 부제를 가진 유홍준의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를 선뜻 주문했다. 옛날 고등학생 때, 그때는 고문(古文)이라고도 했던 국어 교과서를 통하여 나는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라는 말과 세한도(歲寒圖)를 접했지만 그것은 단지 시험 성적을 위한 암기였을 뿐, 그것이 대체 무엇을 함의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며, 세한도가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시절, 그의 제자 이상적이 베푼 우의와 도움에 감사하며 그려준 서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작품이 명작으로 대접받는 이유를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관심 없으니 그러한 것이겠거니, 솔직히 나는 상상 속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겨 놓은 이른바 문인화라는 것과 서예라는 것이 과연 독자적이고 완성된 형태의 예술로 볼 수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가져왔다. 더구나 표음문자인 한글 서예에 이르면 글자를 규격에 맞춰 단정하게 쓴다는 것 이상의 무슨 특별함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왔던 것이다. 물론 서양에서도 캘리그라피(Calligraphy)라 하여 조형의 관점에서 문자의 서체를 연구해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을 디자인 관점의 기술(technic)이라 하지 예술(art)이라 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럼에도 예로부터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서예를 확고한 예술의 영역으로 믿고 또 훌륭하다 알려진 서예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거금을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것은 내가 몰라서 그런 것일 게다, 특히 우리 시대 대표 미학자인 유홍준이 추사 김정희의 인생과 작품 세계를 풀어 쓴 책이라면 서화 또는 서예에 대한 내 무지를 깰 좋은 좋은 가이드가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어쩌면 현대 추상회화라는 것도 눈에 보이는 대로의 형태를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작업일 텐데 국수집에서 본 서예 작품 속, 모양과 소리가 합쳐져 물고기 메기를 뜻하는 형성(形聲) 문자일 점(鮎)자 또한 달리 보면 훌륭한 추상 미술작품으로 나름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주문한 책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를 받아보니 600페이지에서 두 쪽이 모자란 만만찮은 분량이라 한참은 읽겠다 싶었는데 설날 연휴 기간 고향집에서 다 읽었다.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쓰러져 가는 고향 옛집에서는 와이파이도 안되고 설령 그게 된다 하더라도 이제 눈이 침침해서 도저히 핸드폰 화면을 오래 쳐다볼 수도 없어서 명절 연휴 중 차례 지내고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낸 다음 가져간 책 읽는 것 외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아직 책은 읽을 만 하니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것인가? 서예 작품, 그것도 우리 옛 명인들 중 최고라는 추사 김정희의 작품들을 책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접해봤으나 아쉽게도, 내 기대와는 달리 고금의 중국 고사와 서체를 임모(臨摸)하였다는 추사의 서예 작품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훌륭한 예술작품을 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다만, 추사 김정희 개인적 인생 유전에 얽힌, 조선 후기 권력을 두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세도가들의 이전투구에 관한 이야기가 더욱 솔깃했으며 일생을 중국 문화계 인사들과 교유하며 그 저작들을 흠모하는 한편으로 우리 옛 역사와 금석문으로 대표되는 우리 옛 문화유적들을 발굴하는데 노력한 추사 김정희의 행적이 더욱 흥미로웠다. 유가(儒家)뿐 아니라 불가(佛家)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신분과 지위에 구애되지 않고 폭 넓게 이웃들과 교유한 조선 후기 대표 지식인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책 읽었는데 아쉽게도 책을 읽고서도 서예는 여전히 내게 감상 불가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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