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스페인 국경지대에서 시작되어 스페인의 서쪽 끝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이어지는 800km 넘는 순례길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 스페인어 보통 명사로 그저 길이라는 뜻의 카미노로 통하는 이 길의 종착점은 예수의 열 두 사도 중 한 사람인 성 야고보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믿어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이다. 천 년 세월 동안 순례자들의 발걸음으로 다져진 그 길에 오늘날에도 한 해 20만 명이 넘는 순례자, 도보여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고 이들 순례자, 도보여행자의 국적을 가려보면 그 중 열 한번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알려진 그러나 멀고 고되기 짝이 없는 순례길이 썩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담은 산티아고 순례길 답사기가 책으로 나와 있다. 프랑스 작가 장 크리스토프 뤼팽(Jean Christophe Rufin)의 『불멸의 산책』이라는 책이다.
기사에서 우연히 『불멸의 산책』이라는 책 제목을 봤는데 제목이 주는 임팩트 때문에 책을 주문한 후 원제가 뭘까 궁금해져서 다시 검색했더니 ‘불멸의 걷기’(Immortelle randonnee)였다. 원제보다 잘된 의역이다. 책 서두에 담겨 있는 글쓴이 뤼팽의 이력은 이렇다. 의사가 되어 유명한 국제민간의료구호단체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을 했고 픽션과 넉픽션을 합하여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하여 프랑스 최고 학술기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최연소 회원이 되었으며 프랑스 정부로부터 세네갈 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외교관 생활까지 했다. 어쩌다 공무원, 어공이었다가 2010년 그 임기를 다하여 퇴직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홀가분한 기분에 긴 도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가 책에 실린 그의 표현대로 카미노의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에 이끌리게 되고 얼마 후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출간 이전에도 그는 이미 작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지고 있었는데 애초 그는 이 도보 여행을 책으로 남길 의도조차 전혀 없었다고 하며 여행 후 변심 아닌 변심으로 출간을 작정했을 때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하여 『불멸의 산책』이 저술되었다는 점도 함께 밝히고 있다. 출간을 위해서 여행을 떠나고 여행을 떠나기 위해 출간한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해 20만 명이 찾는 도보여행길, 글쓴이에게도 또 읽는 사람에게도 그것은 특별한 경험일 테니까 카미노 순례기를 담은 책은 세계적으로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이미 십 년 전 국내 작가의 카미노 순례기를 나도 읽은 적 있다. 그때는 여행 작가의 재미있는 여행기 한 권 읽은 것으로 치고 말았다. 그런데 어쩌면 별 다를 바 없는 내용을 담고 있을 『불멸의 산책』을 왜 나는 굳이 주문하여 사 읽었을까? 『불멸의 산책』은 이미 관광 상품이 되어버린 카미노를 소개하기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카미노를 분석하고 그 길에 얽힌 역사적 사회적 심지어 철학적 맥락을 짚어본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런 종류의 책들이 넌지시 모른 채 넘어가는 부분, 사람이 견디기 쉽지 않은 육체적 심리적 고단함을 수반하는 도보 여행 중에 표출되고야 마는 사람의 약점과 한계를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그것은 사람을 본성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색하는 작가 뤼팽의 오랜 경험이 이 책에 녹아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면 못 쓴 잡문이나마 『불멸의 산책』을 소개하는 글을 이렇게 장황하게 옮겨 놓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너무 재미있다. 책을 읽으며 빵 터지는 순간마다 책갈피를 접어 뒀는데 책을 다 잃고 책장을 드르륵 훑어보니 접힌 부분이 상당했다. 예를 들어 카미노의 여정에 걸쳐 있는 수도원이 멀지 않은 시골 기사 식당에서 남자 손님들이 여종업원을 성 희롱하는 장면 같은 부분인데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저자의 인간적 면모에서 배어 나오는 여유로움과 유머에 있다 하겠다. 좋은 글은 훌륭한 영혼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다. 스스로 낮추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유머와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지성이 녹아 든 『불멸의 산책』을 읽고 나면 정작 내가 책을 읽는 동안 몰입했던 대상이 카미노가 아니라 바로 작자 뤼팽이라는 사람의 매력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스마트폰이 내 손에 들어온 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책 읽기의 즐거움을 내게 다시 되돌려준 책으로 『불멸의 산책』을 기억할 것이다.
'○ 작은 책꽂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 (0) | 2019.02.26 |
---|---|
영혼의 시선 (0) | 2019.02.14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0) | 2019.02.12 |
2030 에너지전쟁 (0) | 2019.02.02 |
김훈의 개그 본능 (0) | 2019.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