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순환선, 최호철, 2000, 국립현대미술관

 

올해부터 서울지하철 2호선 타고 역삼동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버스 환승 포함 넉넉잡아 편도 한 시간 삼십 분 걸리는 거리다. 여의도로 출퇴근할 때 통근에 두 시간 걸린다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힘들어서 고생 많겠구나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그게 내 이야기가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신도림역과 대림역, 구로디지털단지역, 사당역을 거치는 출근길 2호선 순환열차 내의 아비규환을 달리 여기어 옮겨 놓는 것이야 별 의미 없는 일이겠고 며칠 전에는 갑자기 사당역 즈음부터 배가 아파 자칫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을 뻔한 아찔한 경험까지 했다. 그 아침에 어찌어찌 정말 참고 또 참아 역삼역에 내려 사무실을 향해 달려간 내 달음박질 속도는 우싸인 볼트끕은 되었으리라.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아찔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몇 년간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다가 긴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 안에서 하루 두 시간 정도 책을 읽는다. 우리 서울지하철은 와이파이가 공짜라 데이터 요금 걱정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 볼 수도 있지만 나이 들어 눈이 침침하고 금방 피로해져서 핸드폰 화면을 오래 쳐다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치대이고 시달리며 멍 때리고만 있을 수 없어서 책을 읽는다. 그렇게 하루 두 시간 정도씩 책을 읽으니 벌써 600페이지 두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다 읽었고 어제부터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를 읽고 있다. 어어 하는 25년을 훌쩍 넘겨 버린 셀러리 맨 생활 그간 내가 출퇴근 편하게 하고 다녔구나 하는 깨달음 그리고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버스를 타기 위해, 지하철을 타기 위해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뛰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하는 일은 덤이다. 살 쫌 빠졌으려나.

지하철 2호선 안에서 읽는 하라리의 우리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통찰 그리고 미래를 위한 제언은 심오하다. 하라리는 한국어 판 서문에 가장 빠른 속도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의 자화상, 자살률 1위의 나라, 출산율 최저의 나라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밍국의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있었다. 책 표지에 “from one sapience to another”라는 손 글씨가 보였는데 이건 인쇄를 한 것일까 하라리가 직접 쓴 것일까? 김훈의 글은 그 시절 동네에서 의리 의리 했던 동네 놈상 행님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 동네 놈상 행님 같던 김훈은 이제와 책에서 사내 놈들의 숙명과 지긋지긋한 밥벌이에 대해 말했다. 어쩌겠는가 그렇게라도 벌어야 하며 이렇게 라도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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