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취미라 하기는 계면쩍고 그저 마음 둘 곳 마땅하지 않을 때 모형 만들기에 몰두한다. 대략 2년 주기로 모형 만들기에 집중하는 것 같은데 특히 범선 모형 만들기를 좋아한다. 사실 모형 만들기라는 것이 제대로 만들어 보자고 작심하고 달려들면 이 또한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범선 중에서도 만드는데 그리 큰 비용과 품이 들어가지 않는 작은 세일링 보트(sailing boat)를 만든다.
이번에 만든 세일링 보트는 프랑스제로 2년 전 큰 골절상을 입어 한동안 꼼짝 못하게 되자 소일거리로 만들려고 산 것이었는데 예상보다 회복이 빨라 서재에 묵혀 두고 있다가 이번 겨울 들어 조립을 시작한 것이었다. 키트라 하는 미리 만들어 놓은 부품을 설명서에 따라 조립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대개 이런 모형들이 학교 앞 문방구에서 많이 팔리는 이유 또한 모형 자체를 조립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모형 만들기의 시작과 끝은 도색 작업이고 이 도색작업을 제대로 하자면 품이 만만찮게 들 뿐 아니라 도료를 사는데 돈도 제법 들여야 하며 상당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처음에 마음 둘 곳 찾자고 시작한 모형 만들기 작업이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이걸 왜 시작했나 하는 후회로 바뀐다. 이전에 야심차게 시작했던 제법 큰 모형 범선 커티 삭(Cutty Sark)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가 결국 대청소 중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번에 시작한 세일링 보트 역시 커티 삭과 같은 꼴이 될 뻔 했지만 다행이 오늘 마무리 작업을 끝내고 완성품으로 남을 수 있었다. 설명서에는 이번 모형 이름을 쾌속선 쿠룬(Cotre Kurun)이라 표시하여 쿠룬이 무슨 뜻인지 구글 사전을 검색해봤는데 다국어 사전을 검색해도 그 뜻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침 프랑스어 위키 사전에 쾌속선 쿠룬이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리고 있어 번역기를 돌려 그 뜻을 유추해 보자니 프랑스 사람들로서는 꽤 의미 있는 기록을 가진 유명한 쾌속 범선임을 알게 되었고 쿠룬은 노르망디 너머 프랑스 서쪽 지방 브루타뉴어로 "천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형을 만들며 핀셋으로 실 같은 부품으로 이리저리 붙이면서 내가 왜 범선 만들기를 좋아할까 생각을 해보았는데 내가 모델 만들기에 집중하게 되는 시기가 바로 망망대해에 배 한 척 띄우고 훌쩍 떠나고 싶은 그런 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2년 전 커티 삭을 만들면서 느끼지 못했는데 쿠룬을 만들며 이제 돋보기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 훌훌 털어버리고 망망대해에 배 한 척 띄우고 떠나본 들 눈이 침침해서 항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