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의 땅동토의 땅 그린란드 옆 북극과 가까운 북대서양에 아이슬란드(Iceland)라는 섬나라가 있다. 최근 여행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어 북극권에 가까운 화산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세상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섬이라고 알려졌지만 관광하기 좋은 시기가 년 중 매우 짧으리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북극권의 해양성 기후를 가진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농사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뻔하고 알려진 변변한 광물 자원도 없다. 한마디로 사람 살기에 매우 척박한 환경을 가진 섬이다. 제주도 보다 10배 정도 큰 섬인데 인구는 고작 33만 명, 이름마저 아이슬란드이지 않은가? 날 좋을 때 화산 간헐천과 같은 진기한 구경은 좋겠지만 그곳에 장기간 머문다면 큰 고생이 될 것임에 뻔하다.
사람이 살지 않던 아이슬란드에 9세기경 노르웨이계 바이킹이 정착했고 이들은 척박한 섬에서 자자손손 어업에 종사하며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그러나 유럽대륙의 격변과는 큰 관련 없이 평화롭게 살아왔다. 아이슬란드가 자리한 북대서양 어장은 오래 전부터 어획량이 풍요롭기로 이름난 바다고 아이슬란드인들은 이곳에서 많은 서유럽인들의 영혼의 음식이라 할 대구(cod)를 잡아 생계를 이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평화를 깨는 사건이 생긴 것은 1950년대부터였다. 영국 어선들이 아이슬란드 근해에 출몰하여 어자원을 싹쓸이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영국 어부들이 북대서양 고기잡이에 나선 역사는 아이슬란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러나 산업시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선단 규모도 작고 출몰횟수가 제한적이어서 아이슬란드로서는 큰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어선들이 대형화되고 흔히 쌍끌이 어선이라 하여 바다 밑바닥부터 어자원을 쓸어 담는 트롤어법이 일반화되자 어업으로 먹고 살았던 아이슬란드로서는 생존에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슬란드는 근해에 출몰하여 어자원을 싹쓸이해가는 영국 어선들에 대해 외교적으로 거세게 항의하는 동시에 경비함을 동원해 어자원을 남획하는 영국 어선들의 그물을 갈고리로 찢어버리는 실력행사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 하지 않던가?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강대국 영국을 대상으로 한 약소국 아이슬란드의 실력행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 역시 북대서양 어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가 영국 하면 생각하는 음식 또는 영국 하면 그것 밖에 생각나지 않는 음식, 그렇다, 피쉬 앤 칩스(fish and chips)가 바로 그 대구 생선살을 튀겨내 만든 것이다. 그리고 어업에 기대 생업을 이어가는 영국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던 것이다. 양측 모두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약 20년간에 분쟁을 거듭하던 영국과 아이슬란드의 어업분쟁, 이른바 대구 전쟁(Cod Wars)은 1976년에 마침내 그 정점을 찍었다. 자국 어선단 보호를 구실로 영국 군함과 아이슬란드 경비함이 서로 선체를 직접 들이받는 극단의 충돌사태까지 발생한 것이다. 아이슬란드는 이 충돌에서 영국 군함에 상처를 내는 분전을 거듭했지만 만약 이 충돌이 포를 쏘고 미사일을 날려대는 데까지 확산되었더라면 아이슬란드가 어찌 영국함대를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그 동안 영국으로부터 찔끔찔끔 양보를 받아내던 아이슬란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 근해에서 근절되지 않는 영국의 남획과 어자원 고갈 때문에 특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바로 영국과의 단교를 선언해버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NATO) 탈퇴 의사를 공공연하게 유포하기 시작했다. 그깟 콧구멍만한 작은 나라 아이슬란드와의 단교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나토 탈퇴가 무슨 대수인가 싶지만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1976년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충돌한 동서냉전의 정점에 있었고 군사적으로는 소련과 미국이 핵폭탄을 탑재한 장거리 폭격기를 앞 다투어 배치하는 군비경쟁의 정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이슬란드는 양측 대륙간폭격기의 비행 궤적 거의 한가운데 위치해있었다. 미국으로서는 아이슬란드에 설치한 레이더기지야 말로 소련의 장거리 폭격기를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소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는 핵심 중 핵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슬란드는 이미 19세기말부터 이어온 유럽 강대국들의 분쟁을 통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러시아, 이후 소련은 물론 독일 해군이 대서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사이의 바다를 반드시 통과해야 했고 그러므로 소련과 독일의 대서양 진출을 막아 세계적인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는 전초 기지로서 아이슬란드를 동맹으로 묶어놓는 것은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국가와 진영의 우위 확보 전략이 걸린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럴 리는 전혀 없었으나 아이슬란드가 소련에게 자국 영토를 개방하는 가정은 당시 서방 진영에게는 그깟 대구가 대수냐 싶은 악몽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부랴부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서방 군사동맹 나토가 중재에 나섰고 결국 아이슬란드는 영해기점으로부터 200해리(nautical mile), 약 370km까지를 배타적 경제수역으로 보장받는데 성공했다. 그 성공을 바탕으로 오늘날에도 아이슬란드는 전체 수출액의 40%를 어업에서 충당하고 있고 그 어자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토록 처절하게 지키고자 했던 바로 대구이다. 아이슬란드가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 수역을 보장받자 그 해역에서 오랜 세월 어업에 종사하던 수천 명의 영국 어부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1976년 대구 전쟁이 막을 내린 지 35년이 흐른 2012년에 영국 정부는 당시 일자리를 잃은 어부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어부 2,500명에게 한 사람당 1,000파운드, 우리 돈으로 150만 원 정도를 위로금으로 지불했다. 생업을 잃은 보상치고는 너무도 오래 걸린 위로였고 너무도 보 잘 것 없는 금액이었다. 이처럼 국가란 것이 국가전략과 안보를 내세워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에 동서가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아이슬란드와 영국의 대구 전쟁은 두 나라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 강대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수많은 나라들이 독립했지만 한 동안 그 독립은 영토에서 이루어진 독립이었을 뿐 대부분 신생국가들이 영해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아이슬란드가 대구 전쟁의 승리를 통해 얻은 바다 200해리에 대한 배타적인 경제적 권리 즉, 오늘날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12해리의 영해,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수역이 영국과 아이슬란드의 대구 전쟁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었다. 대구 전쟁 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이에 따라 영해와 배타적 경제수역을 대외적으로 선포하였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제 퇴근 길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EBS 다큐프라임 『생선의 종말』 「2부 세상을 꾼 물고기 대구」편을 보고 흥미를 느껴 남겨두는 잡문인데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려다 보니 알쓸신잡, 알아봐야 별 쓸모없는 잡학 이야말로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닌가, 섭외 안 들어오나?
EBS 다큐프라임 - Docuprime_생선의 종말 2부- 세상을 바꾼 물고기, 대구_#001
EBS 다큐프라임 - Docuprime_생선의 종말 2부- 세상을 바꾼 물고기, 대구_#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