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는 달빛을 아름답게 화선지에 담아내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일제시대부터 담배 포장지 도안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알려진 걸작이 많다. 그래서 대부분 김홍도를 풍속화가로만 생각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빼어난 산수화와 문인화를 많이 그렸다.
김홍도는 그 시대 문인화의 대가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눈에 들어 그에게 사사하여 작품의 격을 높이고 또 그의 천거로 왕실과 정부의 기록화를 담당하는 관청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 되어 직업화가의 길을 걸었으며 임금 영조와 세자였던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스승이자 후견자 강세황은 김홍도를 일컬어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 했으며 부흥 군주 정조는 “그림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김홍도가 주관하게 했다” 한다. 김홍도는 왕실과 정부의 공식 기록화가로서 쌓은 명성 덕분에 몇 차례 벼슬 자리를 얻기도 했다. 김홍도는 뛰어난 화가였을 뿐 아니라 당시 문화적 소양의 기준인 서(書)와 시(詩)에도 뛰어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훌륭한 연주자였으며 한편으로 탈속을 꿈꾸던 화가였고 이러한 성향은 그가 남긴 훌륭한 작품들 속에 녹아 있다. 김홍도의 작품에 내려지는 최상급의 수사와는 별도로 그의 그림에서 감지되는 고적함과 애잔함은 바로 이에 기인하는 것일 게다. 그림에 발문(跋文)으로 남긴 김홍도의 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들 도리어 누가 될 것이고
부귀가 하늘에 닿아도 수고에 그칠 뿐
산 속으로 찾아오는 고요한 밤에 향 사르고 앉아 솔바람 듣기만 할까.
풍속화가일 뿐 아니라 빼어난 문인화가로서 김홍도의 취향과 천재성이 드러난 최고의 작품은 단연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로 꼽히고 나를 김홍도의 그림 읽기에 몰입하게 만든 단초 역시 소림명월도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그림을 들여다 봐도 낙관 외에 다른 글귀가 보이지 않으니 ‘성근 숲에 밝은 달이 떠오르는 그림’이라는 뜻의 소림명월도라는 제목은 후대의 누가 붙인 것 같은데 운치 있는 제목을 붙였다 싶다. 김홍도가 쉰 두 살 되던 해 그린 소림명월도는 가을 야산의 성긴 숲 뒤로 보름달이 떠오르는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배경은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야산 풍경인데 앙상한 나무가 서있는 오른편에 작은 시냇물이 흐른다. 이 작은 시냇물 소리는 만월의 밤 정적의 깊이를 시각으로 환치시키는 절묘한 장치이다. 달은 여윈 나무의 배광과 같아서 그림 속 주인공은 여름을 보내고 소슬한 바람에 마른 잎사귀를 내어준 나무인데 정작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여백으로 남겨진 달빛이다. 그래서 여윈 나무를 앞으로 내밀고 스스로는 텅 빈 여백으로 남은 달빛을 바라보며 느끼는 고적감은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시리게 하고야 만다. 정조 시대의 왕실 기록화들은 사실 회화를 선호하는 내게 있어 눈부시다 표현할 정도로 아름다운 것들이어서 전 시대 조야한 기록화들에서 정조 시대에 보여지는 그 눈부신 진보는 그 시대가 진정 왕조의 르네상스였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 문예부흥의 시대, 우리 회화사의 중심에 단원 김홍도가 서 있다고 단언하고 싶다. 우리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 빠져보면 나의 단언이 그저 허사라고 치부할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중인인 화원이었던 김홍도의 발자취는 정조 임금이 돌아가시자 역사의 행간에서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그의 말년이 가난과 병고로 고통스러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잊혀졌다. 타살의 의혹이 남은 부흥 군주 정조의 죽음과 김홍도의 실종 그리고 그가 남긴 소림명월도를 보면 임금의 죽음과 왕조의 쇠잔함, 한 천재의 쓸쓸한 말년이 오버 랩 되어 쓸쓸한 비감을 남긴다. 밤이 깊고 나는 우리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