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한 그 해 취직해서 회장 비서실 여직원과 교제를 시작했다. 내가 사귄 여자 중 가장 예쁜 여자였다. 지잡대 나와 겨우 취업한 변변한 것 없는 내가 회장님 비서와 교제 할 수 있었던 것은 돌이켜보니 김광석 노래 공이 컸다. 어느 날 내가 속한 재무부서와 비서실이 이른바 조인트 회식을 하고 2차로 노래방까지 갔는데 거기서 나는 눈치도 없이 김광석의 노래 「사랑했지만」을 불렀고 그녀가 내 눈치 없음에 호감을 보였던 것이다. 이제는 노래방에서 억지춘양 격으로 노래 한곡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고음 불가 모드로 「부산 갈매기」 한 곡 대충 부르고 마는데 내게도 노래방에서 「사랑했지만」을 부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김광석은 우리 세대 진정한 가객으로 불러 부족함이 없는 그런 가수였다.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가수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했고 그 즈음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황망했다.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를 봤는데 스토리는 이미 잊었고 다만 극중 인민군 중사 오경필로 등장하는 송강호의 대사 한마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근데 ...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데니? 우리 광석이를 위해 딱 한잔만 하자.” 그러게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을까? 20년도 더 지난 그 김광석의 사망 원인을 두고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 부인 서해순이 결부된 타살이라는 의혹이 드높고 심지어 장애를 가진 김광석과 서해순 사이의 딸 아이 역시 서해순이 최소한 죽음을 방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난무한다. 의혹은 고발이 되고 그에 대해 수사가 되고 있는 와중이라 한다. 방송에 출연해 본인 입장을 변호하는 서해순씨를 봤다. 척 보는 순간 비호감이었다.
며칠 전 김광석이 다른 남자와 만나느라 이틀 동안 남편 곁으로 돌아오지 않은 서해순씨를 원망하며 괴로워 썼다는 일기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살아 생전 김광석이 딸을 끔찍이 사랑했더라는 보도도 봤다. 그런데 서해순에 대한 나의 비호감은 그렇다 치고 지 피붙이를 끔찍이 사랑하지 않는 아비가 있는가? 그리고 김광석은 어떤 방식으로 딸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을까? 그리고 왜 서해순은 다른 남자와 만나느라 이틀 동안이나 김광석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는 유력한 실마리인 당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어땠을까? 김광석과 관련된 여러 보도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이런 궁금증들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서해순이 만난 사람이 바로 김광석의 친구라더라, 김광석이 사망할 때 가까이 있었던 서해순의 오빠가 전과자라더라, 김광석의 저작권을 상속받은 서해순이 저작권료로 얼마의 수입을 올렸다더라 등등 낸 눈앞에 난무하는 이야기들이 내 궁금증 앞을 턱 하니 가로막아 결국 김광석의 그 아름다운 노래들이 막장 치정물의 배경음악으로 들리는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말았다. 의혹에 대하여 사법기관의 수사가 시작되었으니 그 결과를 봐야겠는데 어찌되었건 이 일은 고인인 김광석은 물론 거명된 모든 사람들, 김광석의 노래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을 피해자로 만드는 참 고통스러운 결말을 이미 만들고 만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김광석 노래가 오늘따라 더 애처롭게 들린다.
비서실 여직원과의 교제는 몇 달을 못 넘기고 끝났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격주 토요 휴무제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다른 회사 친구들이 부러워했지만 일토에는 오후 다섯 시까지 일해야 해서 어찌 보면 나이롱 격주 토요휴무제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일토에는 더 피곤함을 느낄 밖에 없었다. 어느 일토, 퇴근 후 그녀와 데미 무어가 출연한 영화 『주홍글씨』를 보러갔다. 단성사였고 그녀가 그 영화를 보길 원했던 걸로 기억 된다. 익히 아는 내용인데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일토 퇴근 후니 영화를 보는 내내 꾸벅꾸벅 졸았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왔는데 도끼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녀 왈, “어떻게 이렇게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서 졸 수 있느냐? 챙피해서 혼났다. 집에 가겠다.” 하였다. 그 시간 이후 내 플랜이 순간 아쉽기는 했지만 단호히 잘 가라, 손 흔들며 보내줬다. 꼭 그 영화 때문만은 아니었고 이를테면 내 기준으로는 영화 같지도 않은 영화에 극 감동하는 그녀가 버거웠을 것이다. 예쁘면 뭐든 용서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사귀다 보면 예쁜 것으로도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서른 즈음에’ 처음 알았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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