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는 적령기라는 것이 있는데 요즘 회사에서 결혼 적령기의 미혼 남녀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요즘 대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하는 선남선녀들의 신규 채용을 기업이 축소하고 있는 채용패턴 변화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얼마 되지 않는 적령기 미혼남녀 특히 미혼 남성들의 발랄한 애정 동향은 선배 직원들의 술자리에서 화제가 되기 마련이다.
지금은 서로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전에 같이 일하던 후배 직원 중에 정씨 성을 가진 서른 살 청년이 있다. 키 훤칠한데다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는 몸 만드느라 여념 없는 정군의 애정 편력은 시니어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는데 만화 슬램덩크에 등장하여 여성 팬들에게 인기 캡짱이라는 채지수라는 별명답게 잦은 데이트 약속을 광고하고 다녔음에도 항시 실속 없음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어서 반쯤은 고소한 반쯤은 안타까운 핀잔을 들어오던 터였다. 어느 선배 여직원 귀띔에 의하면 여직원들 사이에서 정군은 껄떡쇠로 통한다고 한다. 그러던 정군에게 획기적인 변화의 조짐을 감지하게 되었으니 내가 부서를 옮기기 얼마 전 일이었다. 내가 정군에게 직접 들은 바를 그대로 옮기자면 "저도 드디어 사랑의 종착역에 이른 것 같습니다."였다. 아직 누구인지 말하기에는 이르다며 어쩌면 이번 가을에 청첩장을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은 사랑에 빠진 청년의 눈빛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니 순간 나도 저런 눈빛을 뿜어 대며 돌아다닌 적이 있었던가 흠칫 놀라웠다. 비공식 채널을 통하여 정군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사랑의 종착역 역장을 탐문해본 결과 근래 회사 사옥에 입주한 외부 입주사의 비서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부서를 옮기게 되었고 여러 복잡한 일거리에 파묻혀 지내느라 정군이 사랑의 종착역에서 올리게 될 웨딩 마치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어제 오후 일 때문에 내가 일하는 부서에 들린 정군의 모습을 보고서야 그 동안의 진전이 궁금해졌다. 반가운 마음에 우선 정군의 옷소매를 끌어 커피 자판기 앞으로 데리고 가 따끈한 차를 한잔씩 나누며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사랑의 종착역은 어찌 되었던지 운을 띄워 봤더니 대답하는 폼이 영 맥없고 어물어물했다. 재차 채근을 해본 결과 역시 파토가 나버렸다는 실토를 받아 내게 되었다. 그때 정군의 눈빛은 지난 달 사랑에 빠진 찬란한 눈빛이 아니라 흡사 겨울 벌판을 홀로 방황하는 굶주린 한 마리 늑대의 눈빛과 닮아 있었던 것이니 나 역시 가슴이 애리도록 저 처연한 갈구의 눈빛으로 바람 부는 벌판을 사랑 찾아 떠도는 한 마리 늑대의 눈빛을 하고선 긴 혀를 내 빼물고 헐떡이며 거리를 방황한 적 있던가 싶어 또 흠칫 놀랬다. 하여간 정군의 애처로운 눈동자를 쳐다보며 갑자기 쌀쌀해진 바람이 휑하니 틈입해 들어오는 빌딩 창가에서 따끈한 원두커피 한잔으로 목을 축이다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한마디 해줬다.
"그기 사랑의 종착역이 아이라 사랑의 간이역이었던가배"
며칠 전 운전 중 들은 라디오 방송에서 김범룡이 출연하여 그 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잠시 귀 기울여 들었다. 「바람 바람 바람」이라는 히트곡을 낼 당시 덤으로 히트시킨 상품이 하나 있으니 남대문 시장에서 산 승마바지가 그것이란다. 많은 사람들이 그룹 소방차가 남대문표 승마바지의 원조인 줄 알고 있으나 원조는 엄연히 자기라는 것이다.
국내에 한한 얘기라면 그의 주장이 옳은 것일 수 있지만 내가 알기로 1980년대 초반 개구쟁이 「Young Turks」라는 노래를 부르며 다리 쫙 벌려 땅바닥에 엉덩이를 주저앉히는 가랭이째기, 폴짝 폴짝 재주넘으며 뛰어 오르기 등 재롱이 물신 담긴 뮤직 비디오를 타고 이 땅에 등장한 딱다구리 머리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가 그 원조다.
이제 할배가 된 로듀 스튜어트가 다시 승마 바지를 입고 등장한다면 그야말로 '아버지가 입으신 내복 바지'가 될 것이다. 빨간색이라면 더욱 대단한 볼거리일 것이다. 블로그 질로 이렇게 잊혀가던 나의 옛 노래를 재발굴해 내는 재미가 쏠쏠하고 지루한 일상에 작은 위문공연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I don't wanna talk about it」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사랑의 간이역에는 지금쯤 기차가 멈추어 있을까 궁금해져서 혼자 슬며시 웃었다. 200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