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무료시사회에서 『간장선생』이라는 일본 영화를 봤다. 영화 제목을 보고 언뜻 먹는 간장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사람의 장기 간장(肝腸)이라는 것이고 간장선생이란 내과 의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흔한 행운권 추첨행사조차 당첨되는 일이 드물어 기대 없이 인터넷 시사회 초대 추첨에 응모한 것이 당첨된 것이라 사소하지만 내심 기특한 기분까지 들었다. 게다가 정동이라는 동네가 조금 특별한 기분도 들었다. 영화를 다 보고 밤 11시를 넘긴 시간에 경향신문사에서 시청 쪽으로 내려오는 정동의 밤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면서 서울다운 것을 발견한 기분까지 들었던 것이다. 계절이 바뀌면 이 길이 어떻게 느껴질까 궁금했고 덕수초등학교 쪽에서 내려오는 길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했다. 하지만 풍경은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므로 영화 『간장선생』을 보고 나온 따뜻한 마음이 정동 밤길을 그렇게 아름답게 만든 것일 수도 있겠다.
『간장선생』은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감독의 일본 영화이다. 우리나라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빈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신 당시 대통령께서는 영화, 음반 등 "수준 있는 작품"에 한하여 일본 문화를 일부 개방하였다. 그 수준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르겠고 이와이 슌지(岩井俊二)감독의 영화가 수준 있는 작품인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수준 있는 작품으로 그 개방의 범위를 한정한 탓인지 내가 처음 보게된 일본 극영화는 1997년 칸느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작품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의 『우나기』였다.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은 오래전 1983년에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라는 작품으로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으니 일본 문화개방에 편승하여 『나라야마 부시코』가 국내에 상영되는 첫날 상영관을 찾아가 그 영화마저 보았다. 『우나기』는 평범한 직장인이 아내의 외도 현장을 목격하고 혹은 착각하고 무자비하게 아내를 살해한 다음 경찰에 자수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이 남자가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는데 무척 따분하고 재미없더라는 많은 사람들의 영화평에도 불구하고 나를 일본 영화 적어도 이마무라 쇼헤이감독 영화의 팬으로 만들어버린 역작이라 하겠다. 하지만 『나라야마 부시코』는 일본 영화는 우리의 정서와는 맞지 않은 차이가 분명히 있구나 하는 한계를 느끼게 한 영화였다. 그리고 이번에 본 『간장선생』으로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이 뛰어난 영화를 연출해내는 거장이라는 내 믿음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하는 확신하게 되었다.
『간장선생』의 배경은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망으로 치닫는 1945년 6월부터 8월까지,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의 작은 어촌 마을이다. 이 마을의 내과 개업의사인 아가끼씨는 사람들로부터 '칸죠센세' 즉, 간장선생(肝腸先生)'라는 비아냥 같은 별명을 듣는데 이는 아픈 환자는 무조건 간염(肝炎)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유일한 처방전이라고 해봐야 링게루라고 부르는 포도당 주사뿐이기 때문이다. 이 아가끼와 역시 모르핀에 중독된 외과의사인 친구, 땡중, 간장선생을 흠모하는 술집 마담, 그리고 그녀를 흠모하는 그래서 아가끼를 미워하는 덜 떨어진 군의관 그리고 프리랜서 창녀 소노코의 관계가 얽히면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가 우습고 재미있는 와중에 시사하는 것들은 군국주의에 대한 반대, 전쟁의 광기, 평화롭고 소박한 것에 대한 경외 등 여러 가지 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와 닿던 부분은 간장선생이 사명감으로 표현하고 행동하던 것들이 혹시 자신의 공명심은 아니었던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사무치는 회한에 잠겨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었다.
보통 의미를 추구한다는 영화는 재미없는 영화가 되기 쉽고 반면 재미를 추구한다는 영화는 보고 나서 제목조차 가물가물 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관객이 감상 후 제목조차 잊어버리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우습고 또 감동적인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장점이 있다. 내가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두 차례나 수상한 이름 난 감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화에서 아주 보편적인 정서를 아주 감동적으로 그려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는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적인 것의 문제점을 파고드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국내 흥행을 위한 수입회사의 고민 탓이었겠지만 『간장선생』의 국내 홍보물을 보면 마치 이 영화가 에로영화가 아닐까 착각이 든다. 물론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성인용이다. 그러나 성인용이 곧 에로 영화는 아닐 것이고 이 점 또한 내가가 이마무라 쇼헤이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의 한가지로 꼽겠다. 간장선생의 집에는 다음과 같은 액자 현판이 걸려있다.
개업의사는 발이 생명이다. 한 다리가 부러지면 다른 다리로 달리고 두 다리가 부러지면 손으로 달리고 죽기 살기로 달리고 또 달리고 죽을 때까지 달려야 한다.
2001년 올해 일흔 둘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저 죽기 살기로 뛸 뿐이다. 이번 주말에 방콕할 분들에게 영화 머물 예정인 분들에게 『간장선생』을 추천한다. 혹시 간염이 의심되면 진단을 받아보시기를 권한다. 남들은 돌팔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꽤 용한 내과의사 같았다.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 말기 극심한 영양실조와 중노동에 시달리는 보통 사람들이 병에 걸렸는데 그들에게 의사가 해줄 수 있는 처방이 무엇이겠는가. 푹 쉬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 링게루 한 병 꽂아 주는 것 말고 다른 처방이 뭐가 있을 수 있겠는가. 2001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2006년 81세로 타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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