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 Gees - Stayin' Alive

(Saturday Night Fever)

한국은행 본점에서 남산 3호 터널 방향으로 회현고가차도를 가로 지르는 도로의 지하에 회현지하상가가 있다. 명동 롯데백화점 앞길의 명동지하상가가 소공로를 따라 지하철 1호선 2호선과 연결되는 것과 달리 회현지하상가를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하에서 지상으로 다시 나와 다시 지하로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에 서울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사람 발길이 뜸하고 입점 가게들도 고만고만한 등산용품점, 중고카메라나 동전, 우표수집 가게 정도들일 뿐이다. 나로서는 회현지하상가에 중고음반 특히 중고 LP를 취급하는 가게가 몇 개 있어서 가끔 근처를 지날 때마다 기웃거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LP 매니아들에게 명반으로 통한다는 고가의 중고품들은 가게 안쪽 진열대에 꽂혀 있고 한 장에 천 원 이천 원에 팔리는 값싼 음반들은 일정한 분류도 없이 박스에 담아 가게 밖에 진열해두었는데 나는 아직 가게 안에 들어가 고가의 중고 음반을 들여다 본 적은 없고 그저 가게 밖에 놓인 박스를 뒤져보는데 빌리지 피플, 놀란스, 둘리스, 보니엠, 올리비아 뉴튼존, 도나 썸머, 블론디 그리고 들국화, 희자매, 장재남 등등 옛 LP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 마다 빙그레 웃으며 허밍으로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곤 하며 그 사이 내 어린 날의 기억과 소박한 꿈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학교와 공부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고등학교 때 나처럼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함께 밀려난 또래들과 어울려 방과 후에는 찾아갈 곳도 반기는 이도 없는 거리를 헤매기 일 수였고 그러다 지치면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서로의 집을 찾아가 식은 밥으로 허한 배를 채우고는 골방에 모여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도나스 연기를 만드는 짓 따위로 실없는 웃음이나 킥킥거리던 때였다. 그래도 친구 중 그나마 형편이 나은 녀석의 집을 자주 찾게 마련이었는데 어느 날 녀석의 집 안방을 떡 하니 차지하고 반짝거리던 태광 에로이카 전축을 처음 쳐다본 느낌은 경이로움 자체였다. 친구 녀석은 재빨리 제 방으로 건너가 뒷골목에서 사 모은 우리는 빽판이라고 불렀던 불법복제 LP를 텐테이블에 올려놓고 막춤을 추어대기 시작했는데 그 꼴을 보며 다른 녀석들이 죄다 박장대소를 하고 같이 막춤을 흔들어대었다. 나는 건성으로 억지웃음을 웃으며 막춤을 따라 추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결코 녀석들과 같이 웃을 수 없었다.

 

디스코의 열풍이 한창이었던 내 중 고등학교 시절 바덴바덴이니 돌체니하는 디스코텍이 유행처럼 생겨났는데 그때는 보도 못한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와 비지스(Bee Gees)의 사운드 트랙 앨범은 이미 발매된 지 수년이 지났지만 디스코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스테잉 얼라이브」(Staying Alive) 같은 비지스의 노래들이 복음처럼 고등학생인 나를 들뜨게 했다. 그리고 등하교길 버스 정류장 곁에 있던 레코드 가게 쇼 윈도우에 진열되어 있던 정품 라이선스 LP 『REO SPEEDWAGON』 음반은 자켓의 디자인과 타이틀곡 「Keep The Fire Burning」이 어울려 한참 성적 호기심이 충만했던 나를 얼마나 현혹하였던지 노래 이전에 레코드 자켓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어질어질했다. 나는 디스코장보다 막춤보다 디스코 음악이 좋았고 그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태광 에로이카 전축을 갈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에 전축을 사자는 말을 나는 입 밖에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태광 에로이카 전축은 내게 이룰 수 없는 소망이 같은 것이었다.

 

내가 쓸 만한 오디오를 처음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을 한참 건너 군대 갔다 오고 대학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 첫 월급 받은 후였다. 그때는 태광 에로이카 전축의 시대도, 빽판의 시대도 지나 버렸고 내가 산 오디오는 태광 에로이카 위의 빽판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좋은 소리를 내주던 CD 플레이어가 달린 일제 파나소닉 오디오였는데 그것으로 좋은 오디오를 가지고 싶다는 내 오랜 소망을 이루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파나소닉 포터블 오디오의 세월 역시 순식간에 저물어 버렸고 그렇게 세월이 제법 흐른 뒤 한번은 회현지하상가의 중고레코드 가게에서 옛날 LP를 구경하다가 어린 시절 그렇게 좋아했던 수많은 내 나름의 명반들을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잠시 턴테이블을 살까 잠시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턴테이블을 사지 않기로 했다. 아마 턴테이블을 사고 나면 몇 장의 옛 LP를 마련하겠지만 중고 음반가게를 찾는 내 발길은 뜸해질 것이고 결국 회현지하상가 근처를 지나가더라도 중고레코드 가게로는 발길을 옮기지 않으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고 그 결핍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기억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옛날은 거기 그렇게 있는 것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다시 찾아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200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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