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타고 마포대교를 넘어 가는 도중 운전사가 틀어 놓은 라디오 저녁 뉴스를 들었다. 뉴스가 알리기로 우리나라에서 항생제가 잘 듣지 않는 사례가 많아 정작 항생제가 꼭 필요한 환자 치료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다. 예의 외국 선진국 사례를 들고는 전문가의 입을 빌려 이것이 다 우리 국민들의 항생제의 남용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 놓는다.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할 사건들이 너무 많아 뉴스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이미 일반상식이 되어버린 뉴스 아닌 뉴스를 듣는 기분이 복잡했다. 항생제가 듣지 않는 원인은 남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항생제를 남용하게 되는가, 아니 왜 항생제에 의존하게 되는가 그 이유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뉴스가 선진국 사례를 들었기에 나도 좀 아는 영국 사정을 들어보겠다. 영국에서는 심한 감기, 독감 증상으로 병원을 찾아가도 여간 해서 약이나 주사 처방을 해주지 않는다. 의사 처방이라 해봐야 따뜻한 물에 비타민 분말 – 램십(LEMSIP)이라는 레모나 같은 유명한 분말 가루가 있다 - 을 자주 타 마시고 일을 하지 말고 집에서 푹 쉬라는 말만 들을 뿐이다. 이러니 심한 감기에 걸려도 대부분 병원에 찾아갈 생각조차 않는다. 가봐야 약도 주사도 없고 똑같은 말만 듣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의사의 처방 아닌 처방 그대로 비타민 분말이나 뜨거운 물에 홀짝홀짝 타 마시며 일 하러 가지 않고 집에서 푹 쉰다. 영국에서 항생제 주사 한방 맞으려면 응급차에 실려간 상황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볼멘 소리가 이래서 나온다. 이러니 꼭 필요한 상황에서 항생제가 잘 들을 밖에. 아무려나 영국에서는 그깟 감기로 어찌 출근도 하지 않고 집에서 푹 쉴 수 있단 말인가?

 

영국에서는 노동관련법에 따라 일주일 이내에는 질환을 이유로 집에서 쉬어도 결근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유급 병가로 처리된다. 이때 근로자는 말 그대로 '셀프' 진단서(self certificate)를 회사에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 과거 영국 노동관련법은 근로자가 유급 병가를 쓰기 위해서는 의사진단서(doctor certificate)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감기와 같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질병에 걸린 근로자들이 떼로 몰려와 의사진단서를 받고서 집에서 쉬려는 통에 병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어서 일주일 이내 기간에는 "셀프" 진단서도 가능한 것으로 관련 법을 바꾸었다는 것은 영국에서 일할 때 영국인 동료직원에게 들었던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이고.

 

이야기를 돌이켜 제법 오랜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서 일해오며 내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감기를 이유로 유급 병가신청을 하는 동료를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대개는 그저 참고 출근 하거나 출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면 본인 연차휴가를 신청하여 하루 이틀 집에 쉬는 정도이다. 고용 관계 법령을 형식적으로나마 지키는 직장에 다니는 근로자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을 것이다.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 감기를 이유로 어쩌 집에 쉴 수 있다는 말인가? 이때 감기에 걸린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나중 일이고 당장의 생업을 이어가기 위해서, 당장 하루를 살기 위해서 직빵으로 듣는 약, 주사 한 방에 기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뻔한 이치다. 이것은 뉴스가 말하는 남용이 아니라 살기 위한 의존이다.

 

언제나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성질이 급한 국민들 탓, 나중을 생각하지 않는 무대책으로 항생제를 남용 해대는 국민들 탓이지 남용, 아니 항생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도록 사람들을 절박하게 몰아 붙이는 가진 자들 탓도 아니고 남용과 의존을 구분할 줄도 모르는 권력층의 나팔수 밖에 안되는 공영방송 탓도 아니다. 총칼로 권력을 뺏은 것도 아닌데 너 뭔 개소리냐? 막 나간들 당할 재간이 있겠는가? 이 또한 그런 자들에게 권력을 가져다 바친 어리석고 못난 국민들의 탓일 따름인 것이다. 가슴 허한 뉴스 아닌 뉴스를 들으면서 쏜 살 같이 마포대교 위를 질주하는 택시에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니 다리 난간에 파리한 빛을 발하며 "생명의 전화"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 나으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참 훌륭하고 친절한 사회대책이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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