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역 영풍문고

2021. 10.

대학 졸업하던 해 첫직장에서 맡은 첫 업무 중 하나가 그 당시 소위 경리 부서에서 일하던 신입사원들이 거치는 코스처럼 은행 심부름 다니던 일이었다. 오전에 결제할 어음과 당좌수표를 끊은 다음 오후에 거래은행 창구에 이 어음과 당좌수표를 제시하여 자금 결제를 하는 식이었다. 온라인 뱅킹이니 하는 것이 아직 활성화되기 전이었다. 그때 내가 다니던 회사의 주거래 은행이 광교에 있던 조흥은행 본점 영업부였다.

당시 지하철 종각역에서 내려 은행에서 업무를 보고 회사로 돌아가기 전, 언제나 종각역과 지하 출입구로 연결된 영풍빌딩 지하 영풍문고에 잠시 들려 책 구경하는 일은 지잡대 나와서 겨우 서울에 일자리를 얻은,  서러운 일 많던 내 서울살이, 첫 직장생활의 힘겨움을 달래주던 큰 위안의 하나였다. 서점 한쪽에는 음반 코너도 마련되어 있어서 새로 나온 CD의 맛뵈기 음악을 들려주곤 했는데 길보드에 판매되는 조악한 카세트 테이프 음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퀄 음악을 영풍문고에서 즐기는 재미도 쏠쏠했다.

근래 코로나사태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자 여기저기서 그간 못했던 모임 이야기들이 많아지는 것 같고, 사교범위가 턱없이 좁기는 하지만 나 역시 오랜만에 사당역 인근에서 모임 약속을 잡았다. 외근 후 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더니 약속 시간까지 1시간 정도가 남아있어 어찌 시간을 보내나 고민하다가 스마트폰 지도검색을 해보니 사당역 바로 곁에, 마치 그 옛날의 영풍문고처럼, 영풍문고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저없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당역 영풍문고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도 모르게 짧은 혼자소리로 탄식이 나왔다. 얼마만의 서점 출입인가? 오래전부터 책은 온라인으로 주문하여 구매 하였고 서점으로 발길을 끊었는데 여전히 거기, 서점이 있었던 것이다. 얕은 감개무량함에 젖어 서점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 보았는데 확실히 요즘 서점은 책만 팔려고 매장을 열어둔 것이 아니라는 것 등 변화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점 매대 사이사이, 한눈에 보기에도 노년에 속하는 남자들이 서서 진열된 서적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장면들이 보였다. 이 멀티미디어의 시대에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를 보고 더러 텍스트로 글을 쓰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도 이 멀티미디어의 시대 남들 가진 기기도 가지고 있고, 남들 쓰는 기기도 쓸 줄 아는데 나는 여전히 텍스트를 읽고, 보는 사람 아무도 없는 블로그에 텍스트로 글을 쓰고 있으며, 보는 사람 아무도 없는 줄 알면서 쓸 수 있을 때까지는 텍스트로 글을 쓰며 살아갈 것이다.

무려 25년 전, 내가 다니던 회사도, 주거래 은행도 IMF 때문에 세트로 함께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이후 더 이상 종각역으로, 광교로, 조흥은행 영업부로, 영풍빌딩 영풍문고로 갈 일이 없어졌고 빽도 없이 지잡대 졸업장만 달랑 가진 나는 망한 회사를 빠져나와 그래도 재취업해서 이제 완연히 힘에 부치기는 하나 아무튼 그럭저럭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때 조흥은행 영업부 창구를 지키던 그 예쁜 처자들은 다들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지난 주 목요일 사당역 영풍문고의 매대 앞에 서서 잠시 궁금했다.

'○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름쥐  (0) 2021.12.17
가을의 깊이  (0) 2021.11.17
추석에 보름달  (0) 2021.09.23
선암사  (0) 2021.09.16
눈 떠보니 12퍼  (0) 2021.09.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