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thern Wales 2013. 7.

영국 주재원 생활을 마무리하는 여행의 행선으로 웨일스(Wales) 북부지방과 잉글랜드 북서부지방을 택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잊지 못하는 경험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고 날씨까지 눈부신 영국의 여름 햇살과 바람으로 나를 받쳐 주었으니 어찌 환상적이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콘위(Conwy), 란더드노(Llandudno), 카너번(Caernarfon), 보메리스(Beaumaris), 스노도니아(Snowdonia)로 이어진 여행 행선 내내 웨일스 북부지방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교통 근접성 때문에 찾기 쉬운 곳은 아니나 그래도 영국의 진짜 아름다움을 꼭 봐야겠다는 분이 게시다면 웨일스 북부지방을 강력히 추천한다. 단, 꼭 여름 한철에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방문하시기를 권한다.

Northern Wales 2013. 7

스노도니아 산악열차(Snowdonia Mountain Railway)를 타고 스노든(Snowdon)산 정상을 찍고 올 때까지는 그렇게 모든 것이 환상적이었고 일정도 순조로웠다. 그러나 스노든산에서 하산하여 다음 행선으로 점 찍은 포트메리온(Portmeirion)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미 차 계기판에는 앵꼬를 표시하는 빨간색 등이 들어와있었던 것이다. 목적지까지 15마일 정도 남았는데, 게다가 유명 관광지로 가는 길인데 가다 보면 주유소 하나 없으랴 해서 차를 이전 행선인 카너번 쪽으로 돌리지 않고 구불구불한 스노도니아의 산길을 따라 포트메리온을 향해 신나게 달리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스노도니아 산악지대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감상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차창 밖 풍경에 취해, 또 썸머 타임으로 유난히 해가 길어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 날 그 시간이 일요일하고도 저녁 늦은 시간이라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잉글랜드 대도시에서도 일요일 저녁시간이면 동네마트 조차 모조리 문을 닫는데 하물며 웨일스의 한적한 산악지방 일요일 저녁시간임에랴. 네비가 안내하는 주유소는 닿는 족족 문이 닫혀 있었고 자동차의 유류 계기판 눈금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으며 사위는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목적지였던 포트메리온은 문을 닫아 입장조차 할 수 없었다. 아, 어찌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지역 사정은 동네 사람이 가장 잘 아는 법, 마침 길가에 펍(pub) 하나가 눈에 들어오길래 차를 세우고 들어가 이미 술로 얼굴이 불콰해진 남자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근처에 지금 이 시간 문을 연 주유소가 있어?’ ‘응, 5마일 정도 가서 좌회전 후 다리를 건너. 다리 너머 한참 달리면 포스마독(Porthmadog)이 나오는데 거기 24시간 문을 여는 주유소가 하나 있다고.’ 아니 거긴 다음 행선으로 점 찍은 슈루즈베리(Shrewsbury)와 반대 방향 아닌가? 남자의 친절에는 감사했으나 나는 남자의 말보다는 진행 방향 전방 10마일 지점에 주유소가 있다는 네비를 한번 더 믿기로 했다. 친절한 톰톰(TomTom) 네비는 정확히 10마일을 달려 주유소로 나를 안내했지만 주유소의 문을 닫혀 있었고 닫힌 주유소의 문은 소리 내어 두드려도 종내 열리지 않았으며 차의 기름은 완전 바닥이 나버렸다. 패착을 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남의 말은 귀담아 들을 줄 모르는, 당해봐야 깨닫는 내 단점은 웨일스의 오지에서 다시 들통이 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랴.

Northern Wales 2013. 7

이 난국을 어찌 타개할 것인가? 잠시는 지나치는 차량에게 도움을 요청해볼까 고민을 해봤지만 대체 어떤 방법으로 지나가는 차량들이 곤경에 처한 나를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니 이 방법도 여의치 않아 결국 자동차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보험사의 긴급출동 안내원은 상황을 들은 다음 – 상황 참 간단했다 – 나의 현재 위치를 물었고 A470 도로와 A4212 도로의 교차로(T junction)에 있는 주유소에 있다 답했다. 안내원은 내가 있는 위치가 너무 외진 곳이라 긴급출동이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 정도는 걸리겠다는 것과 함께 ‘너 모니 있니?’ 라고 되물었다. 모니가 모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는 내 대답에 긴급출동 아저씨가 기름을 가지고 갈 건데 기름값을 지불해야 할 거 아니냐는 안내원의 핀잔을 듣고서야 ‘모니가 머니(money)’인 줄 알아듣고 너털웃음을 짖고 말았다. 그랬다. 나는 웨일스(Wales)의 오지에 있었고 웨일쉬(Welsh)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두 시간 걸릴 거라던 긴급출동은 한 시간 만에 도착 했는데 기름통을 싣고 온 것이 아니라 레커차가 왔다. 너희들이 하는 일이 그렇지. 어찌되었건 기름이 떨어져 고개를 숙인 나의 애마 은빛 아우디는 레카차에 질질 끌려가는 초라한 신세가 되어 할렉(Harlech) 근처 펍(pub)에서 술 취한 남자가 가르쳐준 바로 그곳, 포스마독의 24시간 주유소를 향했다.

Northern Wales 2013. 7

포스마독에서 기름을 만땅으로 채운 다음 숙소로 예약해놓은 슈루즈베리(Shrewsbury)의 호텔까지 네비를 찍어보니 70마일, 만땅으로 기름을 채우면 440마일은 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24시간 주유소를 구간 구간 만나는 고속도로를 이용할거다 싶어 그전의 처량한 신세는 까맣게 잊고 득의양양하게 악쎌을 힘껏 밟으며 웨일스 산길을 밤새 구불구불 돌고 돌아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거의 자정이 가까웠다. 그래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어처구니 없는 사고 아닌 사고가 없었더라면 내 웨일스 여행은 못 찍은 내 사진들과 함께 그저 아름다운 풍경만 감상하고 온, 먼 훗날에는 싱거운 기억으로 남겨졌을 것이고, 에이폰 트리워린(Afon Tryweryn) 호수의 잔 물결 위에 은 비늘처럼 출렁이던 보름 달빛, 그 아름다운 밤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며 지난 삼 년여 영국생활의 행복한 때로 신산한 나날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2013

'○ 영국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콘위  (0) 2021.05.25
그레이트 오르메  (0) 2021.04.30
스카버러에는 볼거리가 없다  (0) 2021.04.22
순양함 벨파스트  (0) 2020.08.10
셰익스피어의 고향  (0) 2020.06.2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