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근정전· 경회루 ·  수정전
2013. 12.

 

영화 「관상」은 조선왕조 일곱 번째 임금 세조를 곰털 조끼 입고 짐승 사냥, 사람 사냥이나 일삼는 산적 두목 같은 인물로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병약했던 선왕 문종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를 세습하자 어린 왕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권력을 쥐락펴락하던 신하들을 바라보는 전주 이씨 종친들의 눈꼴은 얼마나 시렸을까?

 

이쯤 되면 종친들이 들고 일어날 사정은 무르익었는데 문제는 총대를 멜 사람이 나서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왕의 큰할아버지이자 종친 중 가장 어른 꼴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은 힘 꽤나 쓴다는 어린 왕의 삼촌 수양대군을 아낌없이 밀었고 수양대군은 총대를 메고 눈엣가시 같은 신하 김종서와 그 일파를 가차 없이 척살(刺殺)한 후 권력을 거머쥐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어린 왕은 이 영의정이 너무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삼촌은 만인 위에 군림하고 있는데 본인은 고작 삼촌 한 사람 위에 군림하고 있는 짝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후 사정은 그리 돌아가고 말았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린 왕은 허울뿐인 권력을 스스로 내놓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왕권의 상징인 임금의 도장 옥쇄(玉碎)를 삼촌에게 넘겨줬으니 그 장소가 경복궁 경회루였다고 실록은 전한다. 어린 왕 단종이 훗날 세조가 된 삼촌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양위할 때 수양대군은 엎드려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라며 닭 똥 같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또 실록은 전하고 있는데 이 눈물이야말로 악어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한다.

경회루 아래에는 나중에 경복궁이 중창될 때 수정전(修政殿)으로 이름이 바뀐 옛 집현전(集賢殿)이 자리 잡고 있다. 세종 대에 학문기관의 성격이 강했던 집현전은 차츰 정치 집단으로 변했고 이 집현전 출신의 신하들이 그들이 보기로 부당하게 권력을 거머쥔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다 발각되어 목숨을 잃어 만고의 충신 사육신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 일을 기화로 단종까지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그들이 그렇게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지켜내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조는 권력이 공고해지자 집현전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고 우리 역사에서 집현전의 이름도 그때부터 영영 사라져버렸다.

 

우리가 기억하는 자랑스러운 집현전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전말이 이러하다. 조카 수양대군을 아낌없이 밀어 그가 권력을 잡자 왕실의 큰 어른이 된 양녕대군은 본인 뿐 아니라 대대손손 번창했다. 왕조에 대한 충이나 절개와 같은 관념이 오늘 추운 겨울 날 경복궁을 산책하는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은 잘 모르겠는데 왕조의 법궁 경복궁은 혹한의 겨울까지 아름다웠다.

 

'○ 소박한 나들이 > 우리 궁릉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융건릉의 겨울  (0) 2021.06.18
우리 문화재 잔혹사  (0) 2021.01.06
덕수궁 수문장  (0) 2019.08.06
건청궁 답사기  (0) 2019.03.26
종묘추향대제  (0) 2018.11.1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