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대한문
PANTAX ME Super RMC Tokina 35-105mm 1:3.5~4.3

c. 2008

 

왕조의 몰락과 함께 서울의 옛 궁궐이 제 역할을 잃어버리면서 함께 사라져버린 궁궐 대문을 지키는 수문장 교대 의식이 매일 재연된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으나 역사의 재연에는 합당한 의미와 철저한 고증이라는 수레의 두 바퀴가 있는데 수문장 교대식이 마치 이 두 바퀴가 빠져버린 수레 같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수문장 교대식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일 때문에 서울시청 앞을 지나다가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우연히 수문장 교대 의식을 구경했고 그때 손에 들려 있던 필름 카메라로 그 장면을 몇 장 찍어 보았다.

역시 수문장의 교대의식은 내 기준으로 보자면 부자연스럽고 옹색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런데 인화된 사진을 손에 쥐고 보니 수문장과 휘하 병졸들, 취타대가 입고 있던 의상의 빛깔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 빛깔은 화려하나 강렬하지 않은, 현란하나 산만하지 않은, 소박하나 그것으로 위엄까지 느껴지는 빛깔이었는데 다른 어디서 이런 빛깔을 또 보았던가 싶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빛깔은 오래전 한동안 내 손을 떠나지 않았던 책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중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에서 발췌한 반차도(班次圖) 속에 담겨 있던 왕족과 사족, 문무백관이 입었던 옷의 빛깔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했다. 정조 임금의 치세 그 때가 바로 왕조의 르네상스였다는 기념비적 건축물이 수원 화성(華城)이요 그 바이블이 정리의궤라는 것을 나는 믿고 있는데 정리의궤 속의 화려함이 오늘 내 못 찍은 사진 속의 빛깔로 우러나와 있던 것이다.

그 아름다웠던 시대, 그 시대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정조 임금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극이 드라마로 방영되었다고 한다. 역시 이 드라마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 역사 속에는 어설픈 드라마와 덕수궁 앞의 수문장 교대의식 재연 따위로는 채울 수 없는 내놓아 자랑할만한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가득함을 나는 믿는다. 자긍은 꼭 눈 앞에 나타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사는 것임을 또 믿는다.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왕실기록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중 행렬을 그림으로 묘사한 반차도(班次圖) 일부분, 장용대장(壯勇大將) 서유대(徐有大) 행차 장면

 

 

 

 

대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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