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건청궁

Geoncheongung Palace of Gyeongbokgung Palace, Seoul, Korea

2021. 1. 2.

 

설 연휴에 경복궁(景福宮)에 갔다. 이번 경복궁 나들이의 주된 목적은 경복궁 뒤쪽에 자리 잡은 건청궁을 자세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873년 경복궁 중건 사업이 끝난 이듬해 고종은 경복궁 내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강녕전과 교태전을 두고 경복궁 북쪽에 건청궁(乾淸宮)을 따로 세워 왕비와 함께 기거했다. 건청궁은 경복궁 부속 건물임에도 단청을 따로 칠하지 않고 재목의 색감과 결을 그대로 살린 조선 후기 양반가옥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건청궁 역시 일제 강점기 경복궁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1909년 철거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으며 그 자리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들어섰고 이 건물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쓰이다가 1998년에야 철거되었다. 이후 건청궁은 복원 작업을 거쳐 2007년에 공개되었다. 건청궁의 복원 공개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하고 시간을 내어 건청궁 구경 기회를 엿보다가 이번 설날 연휴에 건천궁을 찾게 된 것이다.

 

내가 건청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곳이 을미사변, 즉 민비라고 했던 명성황후가 일본인 폭력배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 현장이기 때문이다. 을미사변은 생각하기에 창피한 조선 말기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황후가 외국인 폭력배들의 칼에 살해당하고도 황제를 칭한 고종과 벼슬아치들은 살인자들과 그들을 사주한 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뻔히 드러내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한답시고 러시아에 의존했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 약화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 공사가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이다. 이렇게 정치에 폭력배들을 끌어들이는 악질적인 작태에는 원조가 있고 폭력배들이 일으킨 범죄일 뿐 일본 정부는 상관없다 발뺌하는 수법도 오늘날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와 똑같다.

 

명성황후 살해는 일본이 저지른 이른바 단독범행일까? 속명이 민자영 또는 민아영으로 알려진 여인, 오늘날 그 명성황후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 등 창작물을 보면 명성황후가 외국의 힘을 빌려 일본의 야욕으로 쓰러져 가는 조선의 국운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한 이 나라의 "국모"(國母)로 칭송되는데 내 아무리 역사에 과문하기로 또 이들 역사 창작물이 아무리 픽션임을 내세우기로 이것은 차라리 역사 왜곡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명성황후 스스로 정치에 개입하여 근거 없는 권력을 휘두른 일은 그렇다 치고 명성황후가 정치에 끌어들인 여흥 민씨 일가친척들의 행태는 탐관오리의 전형이라 불러도 좋을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뿐더러 이들이 나중에 적극적으로 친일파로 변신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멸망하는데 한 몫 거들었음을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니 이를 둘러싼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웃프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아울러 당시 벼슬아치들의 무능과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겠다는 야욕에 눈이 멀어 며느리를 살해하는 범행에 적극 협력했다는 흥선대원군의 행위는 사학자들이 밝혔다는 대로 일본인들의 날조요 단지 정신줄 놓은 늙은이 망동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명성황후의 살해 사건에 어른거리는 대한제국 시대 우리 선조들의 부끄러운 흔적들을 지울 수가 없는데도 이 시대에 회자되는 을미사변의 전모에는 애국의 국모를 살해한 일본 낭인들 혹은 무사들 그리고 그들을 사주한 극악한 제국주의 일본의 파렴치함만이 떠돌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를 검색해보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인 무리들을 낭인 혹은 무사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들은 낭인, 무사가 아니라 그 대상이 누가 되었건 돈만 주면 서슴없이 칼을 들고 살해해버리는 잔혹한 폭력배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무리들을 낭인이니 무사니 버젓이 지칭하는 우리 시대 역사 인식의 현주소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곧장 조선을 집어 삼킬 것 같았던 일본은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조선에서 오히려 그 세력이 약화되고 말았다. 이 초조함 때문에 일본은 명성황후 살해라는 무리수를 두었고 명성황후의 죽음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버리자 일본의 영향력은 더 위축되었다. 외세에 위협을 느낀 황제가 또 다른 외세에 기대 그 대사관에 신변을 의탁하는 한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는 동안 러시아가 동북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꺼려한 당시 강대국 영국은 일본을 아낌없이 지원했고 내친 김에 러시아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한판 러일전쟁을 벌인 일본이 1905년 승리하자 대한제국의 국권은 고스란히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외세에 기대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대한제국 황제의 운명도 그렇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때는 모두 친 청나라파였다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자 친일파와 친러파로 나뉘어 죽이고 죽는 아귀다툼을 벌이다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모두 친일파가 되어버린 권력자들은 나라의 운명과는 상관없이 그 권세를 잃지 않고 일제 시대에도 잘 먹고 잘살았더라는 후일담도 있다. 친 청나라파와 친러파, 친일파가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사람이었더라는 웃픈 이야기가 드물지 않은 근대 이 나라의 역사를 건청궁 내 명성황후가 살해된 내전 곤녕합 앞에서 못 찍은 사진 한 장 찍으며 씁쓸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건청궁의 겨울 하늘은 그 이름처럼 높고 맑았다.

 

경복궁 건청궁

Geoncheongung Palace of Gyeongbokgung Palace, Seoul, Korea

2021. 1. 2.

 

배경음악

Andre Gagnon

Bleu N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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