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소설을 읽지 않는다. 그 언제는 아마 내게 소설 같은 극적인 삶이 존재하리라는 기대가 사라진 시점일 것이다. 아니면 그런 기대를 가지게 하는 소설이 사라져 버린 시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때 나의 가슴을 뛰게 했던 거장들의 이름은 언제나 가슴 한 쪽에 남아 그들의 근작을 소식들을 눈 여겨 보곤 하는데 근작이라고 해봐야 출판사를 바꾼 것이거나 기껏해야 개작이거나 단편의 배열을 바꾼 것에 불과하거나 심지어는 편역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고전을 차용한 것에 불과하여 내게 실망을 안기곤 한다. 그래도 평소 존재하지 않는 듯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어느 해질 녘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나 여기 있다 그제야 내게 말을 거는 뒷산처럼 존재를 확인하는 작가가 있으니 훤칠한 허우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비집고 소년 같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아는 경상북도 청송의 산간오지에서 1939년에 난 김주영(金周榮)이 그런 분이다.

지금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가 되었다는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낙향한 김주영은 경북 안동의 엽연초생산조합의 주사로 일하다 서른이 넘어 문단에 등단하여 신랄한 입담과 풍자로 산업화의 언저리에서 우왕좌왕하던 현실을 꼬집는 뛰어난 리얼리즘 소설을 선보였다. 갈짓자 걸음을 걷다가 험한 세상이 놓은 돌부리에 채여 무르팍이 퍽퍽 까져 나가던 20대 초반 나를 사로 잡았던 소설 『악령』, 즐거운 우리 집』, 즉심대기소』, 모범사육 등이 김주영의 작품이다. 한편 어떻게 저렇게 섬세하게 유년의 시간들을 붙잡아 두었을까 싶었던 김주영의 이른바 성장소설이 있는데 민음사에서 발간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아들의 겨울은 힘겨운 시절을 건너가고 있던 스물 다섯 즈음의 내게, 자아라고 하기에는 거창하니 그저 지금의 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 정도라고 해두고 하여튼 그런 정체에 대한 실마리 같은 느낌의 소설이었는데 한번은 원피스를 즐겨 입던 학과 동기에게 선물했다가 "이런 소설이나 읽고 다니냐"는 핀잔 같은 반문을 듣고만 아픈 기억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김주영의 이름으로 발표된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와 홍어 등은 『아들의 겨울의 개작 혹은 연작으로 불러도 좋을 작품들이었다. 또 하나 소설가 김주영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들이 객주, 화척 같은 역사소설들이다. 이들 역사소설은 왕조의 역사, 영웅의 역사, 지배층의 역사가 아니라 장똘뱅이와 도척과 노비와 기껏해야 돈 꽤나 만졌으되 봉건신분제 사회에서 천시받던 장사치 같은 기층민의 역사를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또 그 유려한 토속어의 리듬감 있는 전개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주영을 우리 시대 대표 작가의 반열에 올린 수작들로 꼽힌다.

지난 주 퇴근 길에 버스를 기다리다가 여름 더위를 잠시 피하려고 정류장 옆 서점에 들렸는데 진열대 위 미색 아트지에 오랜 흑백 사진 한 장을 담은 표지가 한 눈에 들어 산 책이 김주영의 산문집 『젖은 신발』이다. 40년 가까이 필력을 과시하며 우리 문단에 서 있던 소설가의 첫 산문집이라는 서언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 모든 일에서 이쪽 저쪽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는 요즘 시류를 생각하면 그 오랜 세월 동안 김주영이 소설에만 천착해왔다는 얘기로 읽혔고 한편으로 스스로 그 틀을 깨는 시도라는 얘기로 읽혀 자못 진중한 느낌이었다.

『젖은 신발』은 우리나라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 임인식이 찍은 6.25 전쟁과 1950년대 우리나라 풍경, 그리고 동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들을 보고 그 시대를 거쳐 성장했던 김주영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이입 시킨 독특한 형식의 산문집이다. 임인식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중년의 여인은 호된 가사와 중노동에 시달리며 원수 같은 남편과 가정을 건사하던 어머니가 되고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노을을 등진 채 들판을 걸어가는 남매의 사진은 고된 희생으로 어린 동생을 돌보던 누이가 되고 허허로운 채마밭에 솟은 원두막은 허기진 어린 영혼들이 집요하게 노려보던 원두막이 되고 그렇게 달밤이 되고 뒷간이 되고 누렁이 똥개 복실이가 되고 아련한 기억 속의 친구 빠꼼이가 되는 등 작가의 어린 시절을 구성했던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사물, 가난한 풍경들을 애달프고 아련하게 한편으로 번뜩이는 해학의 토속어로 복원시켜 놓았다.

임인식의 흑백사진 속에 등장하고 기계충이 드글드글한 빡빡머리 소년으로 묘사된 책 속의 화자는 작가 자신이자 돌을 씹어 먹어도 소화가 될 허기 속에 성장하고 어미와 누이의 희생을 디딤돌 삼아 시골에서 대처로 서울로 유학을 떠났던 지금의 장년들이다. 그 장년의 눈으로 펼쳐 보는 오랜 흑백 사진 속의 풍경과 사람들은 가슴 아프도록 슬픈 가난과 배고픔과 희생으로 점철 되어 있고 그래서 결코 아름다운 서정으로 치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솔직히 고백하지만 한편으로 그것들이 그리워지는 까닭은 그것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작가가 있고 또 오늘의 장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웃음에 인색한 나를 박장대소케 하는 김주영의 독특한 해학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끌어왔던 매력이고 조락한 세월의 풍경을 김주영만큼 생생하고 섬세하게 재현할 수 있는 작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 가난했던 시절 작가가 보았던 모습은 읍내의 사진관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국민학교 동기들과 찍은 누런 흑백 사진 한 장만 달랑 남았고 예의 그 사진 속에는 '영원히 잊지 못할 우리의 추억'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런 작가가 1950년대의 수준 높은 다큐멘터리 사진들을 만났을 때 그의 기억은 그 흑백사진의 펙셀 하나 하나에 옮겨 붙어 아름다운 한 권의 산문집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책이 담고 있는 사진과 이야기들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의 모습과 일들이고 게다가 김주영이 그리고 있는 산간의 궁벽한 농촌 일들은 대도시의 그늘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과거도 아니고 어떤 현실감으로 다가오는 것들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난 며칠 동안 『젖은 신발』을 내 시선 밖으로 쉽게 내어 놓지 못한 이유는 그 속에서 작가와 동갑인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시절을 엿본 때문이고 또 일곱 살 터울로 나를 키워낸 누나를 엿보았던 때문일 것이다. 어느 한가 한 여름날 뭉개 구름 아래 까까머리 소년이 고삐를 쥔 채 소 꼴을 먹이며 어느 곳인가를 아득히 쳐다보는 흑백사진이 한 장 있는데 그 사진을 보고 가슴 속에 뭉클한 무엇인가 출렁이는 느낌이 있는 모든 이웃들에게 『젖은 신발』 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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