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사랑이라는 낱말과 등가인 낱말은 그 대상에 대한 관심이다. 내 일찍이 애주가를 자처하였기로 최애하는 술에 대한 관심을 아끼지 않았기로 술을 소개하는 양서가 있다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책을 구매하여 섭렵했던 바이다. 최애하는 대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탐구의 영역, 이 또한 진실로 그 무엇을 사랑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의 영역 아닌가? 최근 『술의 세계사』라는 한동안 보기 드물었던 술을 소개하는 양서를 발견하여 단숨에 구매하여 읽은 후기를 잡문으로 남기려 한다.
사실 책 제목만 보고서는 세계 여러 지역의 명주 그리고 그에 얽힌 그 지역의 고유의 술 문화를 소개하는 책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책 제목이 책 내용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세계사, 즉 역사라는 것은 문자가 발명된 이후 문자로 기록된 바탕으로 이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학문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은 문자 발명 이전 선사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술을 빚고 이를 음용하였는가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 그리고 해설을 기술하는데 대부분의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어서 굳이 말하자면 술의 역사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 술의 고고학에 관한 책이라는 것이 더 합당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고고학과 사학 역시 최애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일정한 관심을 두어온 영역이고 이에 최애 아이템 술이 결부되었으니 내게는 양서 중 양서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제야 저자 패트릭 멕거번(Patrick Edward McGovern)의 이력을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미국 펜실베니아대학교에 적을 둔 생화학 고고학자라고 소개되어 있었던 것이고 책의 원제를 살펴보았더니 "Uncorking the Past: The Quest for Wine, Beer, and Other Alcoholic Beverages"라고 되어 있어서 짧은 영어로 직역하자면 "봉인이 풀린 과거: 와인과 맥주 그리고 다른 알코올 음료에 대한 탐구"라 할 것인데 제목이 이래가지고서야 국내 출판사의 입장에서야 책 팔기 어렵겠다 생각했을 것이 뻔하고 그래도 최소한 "술의 고고학" 정도는 되었어야 이 양서에 합당한 타이틀이 아니겠나 살짝 아쉬운 생각이다.
아무튼 512페이지나 되는 요즘 책으로는 상당한 분량의 책 내용을 과제물로 낼 독후감 쓰듯 여기에 줄줄이 요약 정리하는 것은 객쩍은 일이겠고 다만 내게 인상적이었던 내용 일부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당이 발효가 되면 음용할 수 있는 술이 되는 것인데 자연에는 과일과 같은 당 성분이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며 이 과일이 떨어져 여기에 비가 내려 물기가 얹히면 자연스러운 발효과정이 생기는데 이 천연 발효 알코올을 새와 같은 동물들도 즐긴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마당에 인간과 가까운 유인원이 이 맛난 음식, 좋은 음료의 맛을 몰랐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면 사람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기원은 우리 현생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는 것이다. 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저자는 세계 곳곳의 고고학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을 가지고 그 곳에 살던 고대인들이 어떤 알콜 음료를 만들어 마시고 그들의 음주 문화는 어떠하였는지 "술의 세계사"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렇게 책을 읽자니 북한 평양직할시 상원군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 이른바 상원 검은모루유적의 경우 높게 잡아 그 연대가 6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는데 그때라면 우리 한반도에 호모 에릭투스가 살던 시절이며 그들도 자연에서 발효된 알코올 음료를 즐기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일 테고 그제야 내 머리 속에 그간 내가 우리 박물관에서 숱하게 보아온 우리 신라와 가야의 토기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책에 소개된 황하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페니키아와 고대 터키의 유적지, 심지어 일본 유적지에서 발견된 술의 흔적처럼 당연히 우리 신라와 가야의 고분 속에 봉인된 채로 유물로 남겨진 토기들 속에 우리 조상들이 남긴 술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 이 토기들에 무엇이 담겨 있었던 것인가 즉, 우리 신라와 가야의 조상님네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또 그것들을 토기에 담아 망자를 추모하는 마음에 저승길에까지 딸려 보냈는가 하는 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있다는 소식을 듣지는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다. 우리 고고학계의 학문적 지평이 더욱 다양하게 열려 “술의 세계사”에 못지 않은 학문적 연구 성과와 이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우리 고유의 양서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