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상 작품상까지 수상한 소식에 온 인터넷 판이 난리다. 퇴근 후에 서재에 앉아 유튜브 영상을 훑어보는 와중에도 중언에 부언을 더하여 이 소식을 퍼 나르는 영상이 너무도 많았는데 그 중에 나름 ‘음, 그럴듯하네.’하는 영상이 보여 그 내용에 얽힌 내 생각, 썰 좀 풀어 보려 한다. 이 영상을 올린 사람은 아카데미 측이 봉준호 감독은 물론이려니와 출연진과 스텝들, 제작사 관계자들의 이름을 호명할 때 서구식으로 이름 뒤에 성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성 뒤에 이름을 붙이는 한국식, 범위를 넓혀 동아시아식으로 부른 장면을 주목하며 이것이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가까운 예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김연아 선수가 현역으로 활동할 때는 “Yuna Kim”으로 불렸는데 이제는 “Bong Jun Ho”로 “Park So-dam”으로 불리고 있다며 그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에 퍽이나 감개무량해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감개무량은 좋은데 그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 문제는 ‘맞거나 틀리다’ 또는 ‘바르거나 그르다’의 차이는 아니고 다만 통칭하여 서구인들, 특히 네이티브 영어사용자들의 경우 상대가 불러 달라는 대로 불러주는 것을 매너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김연아의 경우는 자신이 “Yuna Kim”으로 불려지기를 원했고 봉준호의 경우는 자신이 “Bong Jun Ho”로 불려지기를 원해서 생긴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 점이 작지만 더 큰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썰을 이어 가자니 자연 ‘내가 해봐서 아는데’식이 될 수 밖에 없으나 이 블로그는 내가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혼자 소리치고 싶어 파놓은 곳이라 여기서 지껄인들 무슨 흠이 되랴 싶어 계속 지껄이려 한다. 내 영어사용자들과 소통하며 밥 벌이를 해 온지 삼십 년을 바라볼 뿐 아니라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영국에서 주재원까지 한 적 있지만 나는 지금껏 한번도 영어 이름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거울을 보면 그 안에는 돌쇠가 담겨 있는데 어찌 그 모습을 스스로 쳐다보며 스티브라는 이름을 앞세울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영어사용자들에게 스스로를 돌쇠 박이라 소개해본 적도 없으며 나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는 언제나 “Park Dol Soe”였다. 상대방이 우리나라와 관련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 따로 내가 성은 박이요 이름은 될쇠라 부언할 필요가 없었으며 설령 초면이라 하더라도 내가 한국인임을 아는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내 성이 “Soe”가 아니라 “Park”라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를 혼돈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그의 국제적 교양 없음을 탓이지 내가 그의 국제적 교양 없음에 억지로 끼워 맞출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하였던 것이다. 그보다는 대체로 영어사용자들은 자신의 성과 이름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와는 현격하게 달라 성을 간다, 이름을 건다 어쩌고 하는 우리 식의 성과 이름에 대한 집착을 알게 되면 무척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 사람들,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상대가 불러 달라는대로 불러준다.

 

여담이나 내가 영국 주재원 생활을 하는 동안 내 아들 박삼식은 영국 학교에 다녔는데 이 아이 역시 삼식 박이 아니었고 박삼식이었다. 아들은 선생님과 급우들에게 친절하게도 성이 박이고 이름이 삼식인데 그게 한국식이라고 부언은 했다고 하며 삼식이라는 이름이 부르기에 불편하면 이니셜로 불러도 좋다고 자신을 소개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영국 학교로 전학한 처음 한 달 정도 샘쉬이크이라는 해괴한 발음으로 놀리는 아이들도 있었고 더블 에스냐고 놀리는 아이들도 있어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 한 달이 지나가자 급우들은 삼식이라는 정확한 발음으로 저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영국에서 중등과정을 마치고 우리나라로 귀국할 때까지 영국에서 내 아들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박삼식이었다. 아들이 영국 학교에 다닌 지 몇 달 뒤, 같은 반에 홍콩에서 온 중국계 급우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데니스 웡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하며 그 아이를 두고 영국 네이티브 급우 한 녀석이 아들의 귀에 대고, “쟤는 본래 지 이름이 있을 건데 왜 데니스라고 해?”라는 뒷담화를 까더라는 것 역시 내 아들 삼식이가 생생하게 전하는 경험담이다. 축구팬으로서 우리 시간으로 심야에 펼쳐지는 영국 프리미어 리그 경기 중계를 보지는 못하고 다음 날 하일라이트는 챙겨보는데 토트넘 홋스퍼의 경기를 중계하는 영국 스포츠 채널 스카이 스포츠의 아나운서는 우리 손흥민 선수의 활약을 전하며 흉민 쏜이 아니라 쏜흉민이라고 분명하게 발음하고 있다. 당연히 선수 본인이 그렇게 불러달라고 하니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변화는 남이 우리를 어떻게 불러주느냐에 있지 않고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규정하고 소개하느냐에 달렸다. 내게는 이것이 확실히 의미 있는 변화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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