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스테이크키친

청량리 롯데백화점

2019. 3. 22.

영국에서 일할 때 영국인 직장 동료에게 들은 농담인데, 가장 끔찍한 세상이란 , 이탈리아 사람이 뭔가를 조직(organise)하는 세상, 독일 사람이 농담하는 세상 그리고 영국 사람이 요리하는 세상이란다. 실화다. 음식점에서 사먹은 영국 음식이란 게 짜고 기름지다는 것 말고 다른 기억이 없다. 한편 영국 마트에 가보면 식재료들이 다채롭고 값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국 음식점에서 음식을 사 먹을 때마다 다채롭고 값 싼 이 좋은 식재료들로 이런 요리 밖에 내놓지 못하다니 그 영국 친구의 농담 아닌 농담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형편없는 영국 음식에 대한 옛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입에 침이 도는 딱 한 가지 음식에 대한 기억이 있다. 바로 영국산 등심 스테이크(sirloin steak)다.

질 좋은 등심을 기가 막히게 구워낸 스테이크 위에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스테이크 소스의 기억 그런데 나는 소스가 등심에 스며들지 않도록 포크를 집어 들고 재빠르게 소스를 걷어 냈다. 육즙이 샘솟는 질 좋은 등심살에 그 형편없는 스테이크 소스를 버무린다는 것은 등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런 다음 소금과 후추를 쇠 접시 위에 빠르게 갈아놓고 적당한 크기로 스테이크를 썰어 소금에 찍어 먹었다. 아, 그 등심 스테이크를 입 안에 넣고 씹어 먹을 때 내 미감을 자극하던 맛의 기억은 황홀했다. 물론 스테이크에 곁들어 나오는 푸른 채소를 썰은 스테이크에 돌돌 말아먹는 맛 역시 일품이었다. 이때도 소스와 같은 잡 것들이 묻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 영국 생활 중 담아온 많은 사진들 중에 그 맛난 등심 스테이크 사진이 없는 이유가 있다. 잘 구운 등심의 살점이 내 입 안에 돌고 있는데 사진 찍을 정신이 어디 있었겠는가?

어제 백화점에 갔다가 제법 걸었더니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백화점 식당가에서 간단히 요기할 거리를 찾는데 스테이크 집이 눈에 들어서 고민 없이 자리 잡고 앉았다. 우선 시원한 생맥주 한 잔 시키고 만만찮은 가격이었지만 역시 고민 없이 한우 채끝 스테이크를 시켰다. 생맥주 맛이 별로 이기는 했는데 의식적으로 후각 아닌 입 안에 퍼지는 생맥주 탄산의 쏴한 맛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어 나온 채끝 스테이크 소스가 얹혀지지 않은 채 뜨거운 철판 플레이트에 올려 진 한우 채끝의 살점은 영국에서 먹던 유일한 추억의 음식 영국 등심 스테이크의 기억을 오랜만에 떠올리게 할 만큼 너무 맛있어서 폰카에 담은 못 찍은 사진과 함께 잡문 몇 줄 남긴다.

 

'○ 주당천리 · 혼밥식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초적 본능  (0) 2019.04.18
생대구탕 유감  (0) 2019.04.09
주꾸미와 미나리  (0) 2019.03.22
1인 모둠회  (0) 2019.02.24
커피의 발견  (0) 2019.02.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