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국회의사당
Deutscher Bundestag
2017. 2.
브란덴부르크문을 보고 다음 행선으로 정한 곳이 독일 제국의회, 라이히슈타크(Reichstag) 의사당이었다. 브란덴부르크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기도 하려니와 독일 근 현대사를 생각할 때 중요한 상징성을 가진 유서 깊은 건물이라는 해설도 있고 죽기 전에 보아야 할 건축물 식의 리스트에 빠지는 법이 없는 건물이기도 해서 베를린 구경 일정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두껍고 낮은 구름이 내려 앉은 하늘 아래 간간히 빗발까지 흩날리는 날씨 속에 제국의회 의사당 건물 앞으로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1871년 프로이센왕국이 독일을 통일하고 독일제국을 열었을 때 이웃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을 통하여 왕정을 무너뜨리고 국왕을 단두대 올린 경험이 있었을 뿐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프로이센이 제공한 원인, 흔히 보불전쟁이라고도 부르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전으로 프랑스에서는 제정이 영영 문을 닫고 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는 의회 중심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입헌군주제가 확고히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통일 국가의 국체로 군주제를 표방한 독일제국에서는 기왕에 구성된 의회를 외면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프로이센의 재상 그리고 제국 성립 후에 제국의 재상이 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의회에 나가 "연설과 과반수의 찬성으로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 문제의 해결은 무엇보다도 철과 피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독일제국은 그렇게 군국주의의 길, 결국 종말의 길로 나아갔다.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프로이센 시대와 구분하기 위하여 제2제국으로 불리는 독일제국의 의회 라이히슈타크는 실권 없이 황제 카이저를 위한 거수기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 허울뿐인 의회 의사당 건물만은 제국 의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훌륭하게 짖고 싶었을 것이다. 1884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무려 10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94년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멋진 의회 의사당 건물이 베를린 중심가 티어가르텐(Tiergarten) 지역에 들어섰다. 그러나 제국의회 의사당의 유효기한은 1918년까지였다. 군국주의로 폭주하던 독일제국에서 의회는 제1차 세계대전의 개전과 패전이라는 제국의 종말을 막는데 아무 역할을 못했다. 제국의회는 패전 후 열린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공화국 의회가 되었다.
미증유의 인명 손실 끝에 패전으로 막을 내린 제1차 세계대전의 반성으로 독일은 제국주의를 청산하고 철저한 대의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공화국, 바이마르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제국의회에서 공화국의회로 바뀐 의사당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는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체계가 잘 잡히고 보통·평등·비례선거를 보장한 민주적인 헌법을 만들었으며 이 민주적인 헌법을 바탕으로 히틀러는 1933년 독일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몰표를 얻어 민주적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참화를 일으켰으며 그 패전으로 나라를 분단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공화국의회 의사당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큰 손상을 입었고 그 화재의 배후에 히틀러의 나치스가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놓고 제3제국을 표방한 독일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나치스(Nazis)에게 의회 따위는 필요 없으며 그 독재의 말로는 나치스의 몰락, 히틀러 본인의 자살, 그에 부화뇌동했던 자들에 대한 전범 단죄, 독일이라는 국가의 패전과 분단으로 귀결되었다.
제국의회로 지어졌다가 공화국의회가 되었다가 다시 제국의회가 되었던 라이히슈타크는 이미 나치스에 의해 용도 폐기를 당한 신세였지만 그 상징성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집요한 공격 목표가 되었으며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독일 패전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살아남았다. 독일은 동과 서로 분단되었으며 그 수도 베를린도 동과 서로 분단되었다. 라이히슈타크 건물은 베를린을 둘러싼 장벽에 기대 서 베를린에 남았으나 패전 후 들어선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의 연방공화국 의회(Bundestag)는 서독의 수도인 본(Bohn)으로 이사를 가버려 제국의회 의사당 라이히슈타크는 사라진 제국의회 의사당으로 덩그러니 베를린 장벽 서쪽 담벼락에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독일이 통일된 날 라이히슈타크는 화려하게 역사무대에 재등장했다. 통일 다음날 독일연방공화국의 국회의원들은 독일 현대사의 곡절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베를린의 중심가 티어가르텐 제국의회 의사당 건물에서 독일 통일의 상징적 의미로 의회를 열었으며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대대적인 보수공사 끝에 독일 연방공화국 의회 의사당으로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독일연방공화국의 국회, 번역하자면 연방의회로 그 쓰임을 다하고 있는 건물은 한글 정보뿐 아니라 영문 정보까지 모두 제국의회 의사당이라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용도로 보아 연방공화국 의회 의사당인데 건물이름은 건설 당시 제국의회 의사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으로 여행을 가 그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선 내 감회는 별개로 치고 오늘날 제국주의를 그 스스로 표방하고 있는 나라가 없는데도 여전히 제국의회 의사당이라 불리는 건물 앞에 선 아이러니, 어쩌면 그것은 작게는 독일의 근 현대사, 세계의 근 현대사의 아이러니는 함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잠시 그런 주제 넘는 생각을 해봤다.
독일연방공화국 의회 의사당 건물은 출입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았지만 출입구 앞에 늘어선 긴 줄을 보고서야 엄격한 보안 검색을 하는 듯 보여 내부구경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얼핏 겉으로 보아도 껍데기만 19세기 네오르네상스 양식일 뿐 알맹이는 초현대식 건물일 것이라는 점은 시퍼런 빛이 도는 의사당 강화유리창문이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의사당 건물의 돔(doom) 역시 안으로는 의원들의 의정 활동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고 밖으로는 베를린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강화유리를 둘렀다 한다. 죽기 전에 봐야 한다는 세계적 건축물 베를린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타이머로 시간을 맞춘 다음 기념 셀카를 찍고 함부르크로 돌아가기 위해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베를린중앙역과 연방의회의사당 간을 왕복하는 셔틀 지하철역 이름은 제국의회, 라이히슈타크가아니라 틀림없는 연방의회, 분데스타크(Bundestag)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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