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함부르크중앙역
Hamburger Hauptbahnhof, Deutschland

2017. 2. 17.

 

베를린에 구경 다녀오려고 출장 중 금요일 하루를 비워두었다. 시차 때문에 힘든 와중에 일 보러 다녔고 그 피로에다 출장 나흘 차 제법 현지 시간에 적응한 때문인지 베를린 가는 날 늦잠을 자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 호텔에서 함부르크중앙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움직이는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함부르크중앙역 발 베를린중앙역 행 독일 고속열차 ICE 기차는 한 시간 사십 분 걸려 베를린중앙역에 닿는다. 그러나 독일에서 처음 겪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한 시간에 한 대씩 출발하는 베를린 행 열차를 놓치고 다음 열차를 타야 했다.

역에서 표 끊고 열차 시간표를 보니 베를린 행 열차는 7번 플랫폼에서 11시 38분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정시가 가까워 오는데도 기차가 도착하지 않았다. 그 순간 행선과 출발 시간을 알리는 스크린이 갑자기 바뀌더니 베를린 발 열차의 플랫폼이 8번으로 바뀌었고 기차는 이미 문들 닫고서 슬금슬금 출발하기 시작했다. 다급한 마음에 옆에 있던 역무원을 붙잡고 나 저 기차 타야 한다고 사정했더니 풍채 좋은 여자 역무원은 출발선에 선 다른 역무원에게 고래 고래 기차 잡아야 한다는 소리를 지르는 듯 했다. 그러나 시동 건 고속열차를 누가 잡을 수 있으랴.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두고 역무원에게 이 무슨 일이냐 항의 했더니 방송으로 플랫폼 변경을 알렸단다. 물론 독일어로 방송했겠지. 역무원을 붙잡고 실랑이를 벌여봐야 나 같은 여행자에게 아무 득이 되지 않는다. 자 이제 이 표는 어쩌냐 승무원에게 들이 밀었더니 내 표는 플렉시블(flexible)이라 오늘 하루 중 아무 때나 타도 되고 다음 열차 한 시간 후에 출발한다 알려주었다. 감사하게도 그랬구나, 기차표가 비싼 이유가 있었다.  허탈한 마음을 털고 남은 시간 점심이나 먹자 싶어 플랫폼을 빠져 나오려는데 독일 사람 여러 명이 역무원을 에워 싸고 거칠게 항의하고 있었다. 잦아들던 화가 다시 치밀어 "너희 독일 사람들도 난리잖아!"라며 쏘아 붙여주고 나왔다. 역사 식당에서 점심으로 볶음국수를 사 먹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져 호텔에서 아침 때를 놓쳐버린 공복 때문에 내가 날카로워졌겠거니 있을 수 있는 일이 생긴 것이겠거니 했다.

사회 전체가 나사가 한 바퀴쯤 풀린 듯 돌아가던 영국에서 더러 겪던 이런 종류의 나로서는 황당한 사건들 그러다 그것이 다 사회적 긴장과 스트레스가 덜한 나라이기에 벌어지는 일일 것이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바뀌었는데 혹은 생각을 바꾸었는데 이런 사건을 독일에서도 겪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 똑같은 사건이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 플랫폼에서 생겼다면 이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베를린 행 고속열차는 12시 36분 그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를 태운 채 가뿐하게 출발했다. 열차가 역사를 빠져나올 때 차창 밖을 잠시 내다봤더니 특유의 낮고 두꺼운 회색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베를린 가기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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