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마니산
2006. 6.
세상을 뒤집어 권력을 차지한 세력이 그 변동의 힘을 무력에 의존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고려도 무력으로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열었지만 정작 왕권이 안정된 뒤로는 철저하게 무(武)를 누르고 문(文)을 숭상했다. 무신들은 멸시를 당했고 결국 자신들이 지닌 무력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이후 100년간 허수아비 왕을 내세우고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이를 역사책에서는 1170년에 일어난 고려의 무신정변이라 가르치고 있다.
고려가 무신 즉, 사병을 거느린 군벌집단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세계 제국으로 팽창하는 몽골제국이 흥기하던 시점과 겹치고 있었다. 중국 대륙을 석권하고 동유럽까지 압박하던 몽골군대의 일부는 말머리를 한반도로 돌려 고려를 침략했다. 다만 초기에 고려는 몽골의 정복 우선순위에 밀려 있어서 몽골군대는 군사적 위세만 보인 다음 고려에 조공을 요구하는 선에서 물러나려는 복심을 가지고 있었다. 외세의 군사적 침략에 굴복하는 것은 당시 고려를 통치하고 있던 무신정권의 존립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짓과 같았다. 당시 무신정권이 세계 제국으로 뻗어 나가고 있던 몽골에 대항할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항복할 수도 없던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유추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 같다. 이때 무신정권은 아주 기발한 해결책을 생각해내게 되었는데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 버린 다음 강화도를 근거로 농성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1232년의 일이었다.
이후 38년간 고려는 강화도에서 몽골의 침략에 대해 섬에서 버티는 농섬 아닌 농성정부를 꾸려 나갔다. 강화도는 고려 수도 개경과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역사책에서는 그 가까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륙 초원에서 흥기한 몽골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해전을 기피하여 그토록 오랜 기간 섬에서의 버티기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반면 이 시기에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이 조판되었는데 전 근대시대 대장경의 조판에 들어간 그 어마어마한 수고, 재정이 투입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섬에서 농성 중인 권력 기능, 특히 세금을 거둬들이는 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겠고 그렇다면 몽골은 섬에서 버티기로 일관하는 고려 정부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보면 강화도에서의 농성은 무신정권으로 봐서는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아주 기발한 해결책이었던 듯싶고 그 때문인지 강화도에서의 농성은 무신정권 아래 이후 무려 38년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장기간의 농성에서 싹트는 피로감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 강화도에서 무신들은 권력을 놓고 서로 이전투구를 벌였고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와해되었다. 1270년 무신들이 정권을 잃은 그 해 고려는 몽골에 굴복하여 몽골의 사위 나라, 부마국이 되었고 왕실과 지배계층은 강화도를 떠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 이후 권력을 잃은 무신들을 추종하던 혹은 고용되었던 사병들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몽골과의 강화, 환도를 굴욕이라고 부르짖은 무신들의 사병집단은 그 주특기를 살려 강화도에서 전라도 진도로 도망하여 농성을 벌였고 고려 정부군에 쫓기자 다시 제주도로 도망하여 농성을 벌였으나 결국 고려 정부군에 최후를 맞아 전멸하고 말았으니 1273년이다. 진도에서 농성 중이던 무인들이 스스로 정부를 칭하고 인근 지역에서 세금을 거둬들였다는 것 역시 그들의 주특기로 역사가 전하는 바이다. 3년간 고려 무인정권의 사병이었던 삼별초(三別抄)의 자랑스러운 대몽항쟁의 전말이다. 나는 아직까지 내가 아는 항쟁이라는 사전적인 의미에 충실하게, 강화도로, 진도로, 제주도로 도망한 고려의 무신들이 나라의 군대를 강건하게 육성하여 다시 육지로 치고 올라가 몽골군을 국경 바깥으로 몰아내려는 시도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우리는 부끄러운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고 누가 우리 역사에 부끄러운 점이 많았다 이야기하면 그를 두고 화를 낸다. 부끄러운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이리라.
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에 산행을 했다. 강화도라는 이름은 우리 역사책 행간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이름인데 이는 강화도가 고려의 수도 개경, 조선 그리고 당대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과 아주 가까운 큰 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해발고도 468m의 마니산 정상은 만만하게 보이면서도 오르기 쉽지 않은 산이었다. 바다에서 가파르게 치솟은 산이기 때문이려니 싶다. 그 마니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가을 하늘 산 바다는 곱고 아름다웠다. 산행으로 쏟아낸 땀방울을 식히며 가만히 산 아래를 처다 보니 사람 사는 마을이 보이고 곳곳에 저수지가 보이고 드넓은 평야에 황금빛으로 영글어 가는 알곡을 품은 논이 보이고 갯벌이 보이고 염전이 보이고 또 서해바다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산에서, 논에서, 갯벌에서, 염전에서, 바다에서 생산되는 산물은 얼마나 풍요로울까 싶고 이 모든 것을 한 섬 안에 종합세트로 갖춘 강화도야 말로 농성의 요지 중요지가 아닐까 싶었다. 강화도에는 일찍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는 생생한 증거 고인돌이 숱하게 흩어져 있으니 이 역시 강화도가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사 덧없음을 문자로 빼곡히 옮겨 놓은 그 역사가 있기 전부터 살기 좋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땅임을 증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