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고당봉

2017. 1. 27.

Godangbong Peak of Geumjeongsan Mt., Busan, Korea

 

설날 연휴에 노모 계신 부산 고향집에 가서 설 전날 오랜만에 부산의 진산 금정산 산행에 나섰다. 부산 지하철 범어사역에 내려 버스 갈아타고 범어사에 도착하여 경내를 한 바퀴 돈 다음 금정산성 북문을 향해 열린 범어사 서쪽 등산로를 따라 산행을 시작했다. 범어사 서쪽 산길은 금정산성 북문과 금정산 최고봉 고당봉까지 가장 빠른 길이기는 하나 가파르고 화강암이 지표에 노출된 후 오랜 세월 동안과 바람에 깎여 흩어진 돌길로 산행하기 힘든 산길이다. 범어사와 금정산은 현재 행정 구역으로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속하지만 그 지역에 뿌리를 둔 사람들은 부산이 아닌 동래의 절과 산으로 친다. 내게도 범어사와 범어사를 품은 금정산 계곡은 중학교 고등학교 때 학교 소풍 장소로 찾던 친숙한 곳이다.

 

고등학교 가을 소풍 때였다. 소풍 장소는 금정산성 북문이었는데 다른 반 아이들은 김밥 다 까먹고 사이다로 목까지 축인 다음 그날 소풍 일정을 마치고 서둘러 범어사 서쪽 산길을 향해 하산을 시작했는데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반대로 금정산성 북문에서 다시 가파른 돌길 800m를 더 올라가야 하는 고당봉 정상을 향해 한 학급 70 여명 고등학생들을 이끌고 산행을 시작했다. 선생님을 따라 가파른 돌 산길을 오르는 동안 내 앞 뒤에서 가뿐 숨소리와 함께 난무하던 낮은 씨발 소리가 아직 귓가에 생생하다. 교실에서 공공연히 교사가 학생들에게 빳따를 치던 그 시절에 선생님을 향해 산에 못 올라간다 버티던 아이도 없었고 소풍 후에 그를 이유로 항의하던 학부형도 없었다. 그때 우리들을 부산에서 제일 높은 금정산 고당봉까지 끌고 갔던 담임 선생님은 우리들의 낮은 욕지거리를 듣지 못했을까? 동네 뒷산도 아니고 처음 높은 산 정상에 오른 그때 내 감회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후 더러 산행을 즐겨왔고 동래 고향집에 들릴 때 시간 여유가 있으면 금정산 고당봉 산행에 나서는 것을 보면 그 가을 소풍날의 기억이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 있을 만큼 강렬했던 것 같다. 그때 담임 선생님은 못해도 팔순은 넘기셨으리라.  학교 뽀디빌딩부 지도교사였고 운동 만능이셨던 그분은 여전히 운동으로 몸을 가꾸며 건강하게 살고 계실까? 나는 아무리 좋은 기억을 함께했던 사람이라 해도 이런 저런 인연을 매듭짓고 세월 따라 각자의 길을 걷게 된 후에는 그저 좋았던 기억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라 믿을 뿐 옛 기억 속의 사람들을 애써 다시 찾지 않는다. 내 인간관계가, 요즘 말로 사회적 네트워크가 턱 없이 얕은 까닭이리라. 이 얕은 네트워크로 이제까지 버티며 살아왔는데 요즘은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잦다. 그렇다고 이제와 이런 나를 되돌릴 방도도 없지 않은가?

 

범어사 서쪽 돌길로 이어진 가파른 사면을 타고 올라가면 평탄한 길이 나서고 이내 눈앞에 동래산성이라 많이들 알고 있는, 동래에 있는 금정산성 북문이 눈앞에 보이는데 북문에서는 또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화강암 덩어리 고당봉이 눈에 들어온다. 고등학교 때 유행이던 비비 농구화 신고 처음 금정산성 북문을 보았을 때는 성루도 없이 무너진 돌 더미 속에 옛 성문의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 자리에는 소박한 성루가 복원되어 얹혀 있었다. 서울 도성은 물론 오늘날 남아 있는 이 땅의 옛 성을 찾으면 조선 숙종 때 성을 크게 정비했다는 안내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장희빈을 총애 했다는 사랑꾼 숙종 임금이 무슨 용심으로 온 나라의 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는지 이유는 모른다. 설날 아침 차례 지내고 들은 형수 말로는 지난 해 2016년 가을에 고당봉 정상에 벼락이 떨어져 고당봉 정상 표석이 깨지고 말았다 하고 그 표석을 새 것으로 바꾸는데 금정산 고당봉을 사랑하는 부산 시민들의 성금이 이어져 새로운 표석을 세우는데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아주 볼만한 행사가 벌어졌다고 한다. 한편 벼락 맞아 깨어진 옛 표석은 고당봉 아래 북문 근처 산장에 전시되어 있다 하는데 ‘하늘의 기운’을 맞아 깨진 옛 표석의 정기를 느끼겠다고 산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정오 무렵 시작된 산행이고 겨울 해는 짧으니 북문에서 잠시 목만 축인 다음 고당봉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당봉 정상에 서니 서쪽으로 유장하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낙동강 물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울보다는 부산의 겨울 기온이 5도에서 10도 정도 높다는 것이 개인적인 느낌이고 마침 설 연휴 기간 동안 전국이 포근한 날씨를 보였다 해도 해발 800m 고당봉 정상에 부는 겨울바람은 매섭기 짝이 없어서 정상 등산길에 비 오듯 쏟아진 땀을 식히려 벗은 자켓을 다시 챙겨 입고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은 등산과 반대 코스인 범어사 동쪽 길 코스로 잡았는데 장비 없이도 정상에 쉽게 오르도록 마련해놓은 나선형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가파른 산비탈을 타고 불어 닥치는 바람이 사뭇 거세다 못해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이었다. 고당봉 바로 아래에는 지질 용어로 토르(tor)라 하는 지표에 노출된 큰 화강암이 풍화되어 거대한 탑처럼 봉우리들이 서 있는데 그 중 백록담처럼 꼭대기 가운데 부분이 패여 빗물이 고인 봉우리가 있고 그 봉우리를 사람들이 금(金)샘이라 해서 금정산(金井山)이라는 이름이 그에 유래했다 한다. 그 동안 고당봉은 서쪽에서 올라가 올라간 길로 다시 내려왔기 때문에 금샘 봉우리는 나로서는 고등학교 소풍 이후 처음 본 셈인데 그때는 지금처럼 정상까지 계단이 잘 정비되어 있지도 않았건만 교복입고 비비 농구화 신은 학생들을 데리고 어찌 저 금샘 봉우리까지 학생들을 끌고 갔던지 그때 담임 선생님의 강심장에 다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폭력 같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던 그 시절 학교였는데 그래서 그 시절 학교에 대한 내 기억이 온통 어두운 빛깔로 물들어 있는가? 잘 모르겠다.

 

산행 코스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지도 등고선을 살펴보니 둘러가는 길 이기는 해도 평탄한 길일 것 같아 하산은 범어사 동쪽으로 열린 길을 택했고 뜻하지 않게 금샘 봉우리를 다시 본 수확이 있기는 했어도 등산길 두 배 이상 거리의 하산길을 걷는 동안 다리가 아파 몇 번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산에 가는 일을 등산이라 하지 않고 산행이라 한다. 산행의 고단함은 가파른 산길을 숨을 헐떡이며 오르는 등산길이 아니라 하산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 순간부터 이리라. 간혹 산행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산에 올라가는 이야기뿐 하산길의 고단함을 자세히 그려낸 다큐멘터리를 본 적 없다. 그것은 하산길이란 드러내놓고 기록해야 하는 과정이 아니라 묵묵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묵묵히 혼자 잘 감당해야 하는 산에서 내려오는 길,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산에서 내려와 범어사에 도착하니 그 수종의 이름은 모르나 난대성 수목임에 틀림없어 겨울에도 푸른빛이 선명한 숲길이 나를 반긴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 울창한 대나무 숲을 본 적이 없다. 2017

 

금정산 고당봉

2017. 1. 27.

Godangbong Peak of Geumjeongsan Mt., Busan, Korea

 

 

배경음악

김영동

「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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