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헐│왕들의 경배│1564년│런던 내셔널갤러리
Flemish renaissance artist Pieter Bruegel the Elder ·The Adoration of the Kings · National Gallery, London
런던 내셔널갤러리에는 중세와 근대 유럽 각국 회화의 걸작들이 모여 있다. 이 걸작들을 보는 관람료는 공짜다. 내셔널갤러리에는 하루 종일 이 그림만 쳐다보고 앉아 있어도 행복하겠다 싶은 걸작들이 많지만 그림보기의 재미로 치자면 단연 16세기 플랑드르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제일이며 그 중 볼 때마다 나를 웃게 만드는 작품이 바로 피테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왕들의 경배」(The Adoration of the Kings)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이다.
한글 성서에는 왕이 아니라 동방박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세 사람은 베들레헴에서 예수께서 탄생을 하셨을 때 금, 향료, 몰약이라는 진귀한 물품을 가지고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러 등장한 사람들이었다. 이 장면은 중세 이래 수많은 종교화의 테마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성탄 카드며 성당과 교회의 장식 등으로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브뤼헐의 이 그림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는 성스러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세파에 찌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세 사람의 왕 혹은 박사는 물론이거니와 주변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러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나신 아기 예수님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경배자들의 손에 들린 진귀한 물품들에 온통 쏠려 있다. 제사보다는 젯밥에 정신을 팔고 있다는 속담이 이 보다 더 딱 들어맞는 그림이 또 있을까 싶어 볼 때마다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는 1564년 작품이다. 브뤼헐의 이 작품은 16세기 종교개혁이 가장 활발했던 플랑드르 지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참작할 때 더욱 의미 있는 작품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러나 걸작이라는 것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구태여 화가가 언제,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가 하는 정보를 미리 알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걸작이 아닐까?
성스러운 제단 너머 신성은 알 바 아니고 그 제단 앞에 쌓인 제물에만 온통 눈길이 팔려 있는 모습은 브뤼헐이 살다간 그 시대와 장소만의 모습일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이 자리에서도 그 모습은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브뤼헐의 이 그림은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 같다. 내 눈에는 그렇다. 썩소도 웃음이기에 덤으로 명작을 보며 웃어 즐겁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