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 34세에 그린 자화상 │ 1640 │ 런던 내셔널갤러리

Rembrandt, Self Portrait at the Age of 34, Rembrandt, 1640, London, National Gallery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는 1606년 네덜란드 레이든(Leiden)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커다란 풍차 방앗간을 소유한 제분업자였으며 모친은 역시 제빵업자의 딸이었다. 형제가 일곱에서 열 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이름 없는 제분업자 집안을 속속들이 알아내기에 그가 살던 17세기와 네덜란드라는 시공간은 너무 멀다. 1621년 열 다섯에 레이든 대학에서 잠시 수학 했지만 채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림 배우기에 나섰다. 그는 이내 스승들을 훌쩍 뛰어 넘었다. 열 다섯에 그림 배우기를 시작한 렘브란트는 스물 하나에 스스로 스튜디오를 열고 제자들을 받았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이 유명세로 1634년 상류계층 출신인 사스키아(Saskia van Uylenburg)와 결혼했다. 아내 사스키아는 아름답고 영민한 여자였으며 게다가 막대한 결혼 지참금을 가지고 왔다. 렘브란트는 화가로 다진 명성에다 결혼과 함께 신분상승의 욕구, 금전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그는 더욱 유명해졌으며 더욱 부유해졌다.

당시 유럽에서 유명 화가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르네상스의 고향 이탈리아에서의 수련은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렘브란트는 평생 네덜란드를 떠나지 않았고 대신 르네상스 대가들의 그림들을 사버렸다. 넓은 작업 공간을 가진 큰 저택으로 이사도 했다. 아내의 거듭된 사산으로 슬픔을 겪기도 했겠지만 그의 그림 속에 찬란한 미소년으로 등장하는 잘생긴 아들 티투스(Titus)도 얻었다. 그러나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렘브란트는 기이한 장식품과 값비싼 그림, 쓸모없는 갑옷과 무기들을 많은 돈을 들여 사 모았고 이내 주변에서 아내의 막대한 지참금을 탕진하고 있다는 수근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마 처가 쪽으로부터. 렘브란트는 자신의 무릎 위에 아내 사스키아를 걸터 앉히고 술 취한 얼굴로 축배를 드는 자화상을 그려 세상 사람들의 수근거림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대변했다. 술기운으로 비틀어 웃는 그의 입 꼬리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개소리들 하지 마시라"고.

 

렘브란트 │ 탕아로 묘사한 자화상 │1635 │ 독일 드레스덴 알테 마이스터 미술관

Rembrandt, The Prodigal Son in the Tavern, 1635, Gemaldegalerie Alte Meister, Dresden, Germany

 

1642년에 아내 사스키아가 결핵으로 사망했다. 사스키아의 재산은 렘브란트가 아닌 아들 티투스에게 상속되었다. 다만 티투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상속된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는 재혼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고 렘브란트가 쓸 수 있도록 해두었다. 꽃다운 나이에 먼저 보낸 아내 사스키아는 무섭도록 영민한 여자였다. 렘브란트는 그런 사스키아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들은 8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아이 넷을 가졌다. 비록 티투스만 살아남았지만. 어머니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아들 티투스를 위해 유모를 들였다. 이 유모를 건드린 렘브란트는 이후 큰 고역을 치렀다. 고약한 여자였던 것이다. 대신 집안일을 돌보려 들인 젊은 여자가 엔드리케(Hendrickje Stoffels)였다. 그녀는 평생을 렘브란트와 함께 했다. 그녀는 렘브란트가 그린 많은 걸작들의 모델이었으며 딸인 코르넬리아의 어머니였고 렘브란트의 빚 문제 등으로 렘브란트 대신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그녀는 렘브란트의 두 번째 아내였지만 그녀와 결혼하지 못했다. 사스키아의 사후 렘브란트는 빚에 쪼들리기 시작했고 엔드리케와의 결혼은 그 나마 그의 몫이었던 사스키아의 유산에서 나오는 이자마저 손에 쥐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 │ 개울에서 목욕하는 여인 (엔드리케 스토폴스로 추정)│ 1654 │ 런던 내셔널갤러리

Rembrandt, A Woman bathing in a Stream (Hendrickje Stoffels), National Gallery, London

 

오늘날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시대를 연 최고 화가 대접받는 렘브란트, 그러나 화가는 예술가이면서 또한 비즈니스맨이어야 했다. 화가의 영역은 부자와 지배계층의 초상화,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역사 기록화, 그들의 문화를 반영하는 신화 속의 이야기들과 그들이 믿는 종교를 위한 성화를 주문자의 기호에 맞게 그려 주어야 했다. 렘브란트는 주문자의 기호보다는 자신의 기호에 맞는 그림을 그리려 했고 또한 예술가이고 싶어 했다. 그는 당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기념 촬영식 단체 초상화에서 벗어나 그만의 독특한 색채와 명암의 효과를 살려 대담한 극적 구성으로 그림을 그렸으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렘브란트는 주문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화폭에 그들의 영혼을 담고 싶었으며 이를 위하여 끊임없이 모델을 관찰하고 모델의 얼굴에 나타난 그의 영혼 담기 위해서는 쉼 없는 세심한 붓질이 필요했다. 이것은 주문자의 입장에서 그의 초상화를 얻기 위해서는 너무도 오랜 시간 그의 캔버스 앞에 모델로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또한 주문자의 의도대로 초상화가 그려지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주문은 급감했고 그는 쪼들려 갔다. 그 사이 더러 대작을 주문 받아 그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단지 짧은 옛 영광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했으며 그는 빼어난 옛 화가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뿐 당대의 화가로서의 관심은 점점 멀어져 갔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고 렘브란트는 늙어갔다. 그를 돌보던 사랑하는 아내 엔드리케와 잘생긴 아들 티투스조차 그보다 앞서 삶을 접었다. 그리고 렘브란트는 파산했다. 평생을 자식을 읽고 비탄에 잠긴 늙은 화가는 때로 그 모든 슬픔에 아랑곳없는 당당한 자세로 파레트를 굳게 쥐고 세상을 노려보고 있기도 하고 때로 처진 눈거플에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남루한 옷가지를 겨우 걸친 채 비천한 눈길로 돌아서서 세상을 바라보기도 한다. 캔버스 안에서.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의 화가로 불린다. 그보다 화폭 안에 색채로 명암을 훌륭하게 처리할 수 있는 화가는 없었다. 그의 그림들은 기술적으로 정교하기 그지없었으며 색채와 윤곽 모두 빛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의도된 회화적 효과를 높이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렘브란트에게 명암은 그림의 생명을 불어넣는 근원으로 인간 심상을 표현한 모습은 그의 특유의 명암법에서 볼 수 있어 그를 혼의 화가, 명암의 화가라 부르는 것이다.

 

렘브란트 │ 63세에 그린 자화상 │ 1669 │ 런던 내셔널갤러리

Rembrandt, Self Portrait at the Age of 63,  London, National Gallery

 

그의 작품은 유화가 대략 600점, 동판화가 300여 점, 그리고 많은 습작과 드로잉들이 남겨져 있다. 그중 동판화 20점을 포함하여 거의 100점이 스스로를 그린 자화상이다. 그처럼 다양한 복장으로 다양한 표정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자화상을 그려온 화가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또 자화상의 화가이다. 빛과 어둠의 화가답게 그의 자화상에는 그가 겪어온 생애 순간순간의 빛과 어둠이 담겨 있다.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그의 당당함, 때로 화려하게 차려 입은 채 세상의 중심에 캔버스를 놓고 세상 모든 것을 그릴 수 있다는 듯 팔레트를 손에 꽉 준 자신감, 혹은 사랑했던 아내 둘을 잃고, 사랑하는 아들마저 먼저 보낸 비탄, 살아서는 그들에게 짐이 되어 버린 자신의 초라함, 때로 분노하고, 때로 의심하며, 슬프고, 고달팠던 모든 것들이 여과 없이 그가 평생을 통하여 그려왔던 자화상들에 담겨 있다. 그 자화상 중 세른 넷에 그린 것과 예순 셋에 그린 것 두 점을 런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 전시하고 있다.

1669년 예순 셋의 나이로 회화의 거장은 암스테르담에서 가난하고 쓸쓸하게 생을 접었다. 딸 코르넬리아가 그의 임종을 지켰다. 렘브란트 말년에 그려진 자화상 두 점이 전한다. 사망하기 전 그려진 초상화에는 여지없이 늙어버린 초췌한 노인이 두려운 듯 한껏 몸을 움츠리고 세상을 훔쳐보고 있지만 사망하던 그 해 그려진 초상화에는 두 손을 겸허하게 모으고 그윽한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그림의 대가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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