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세상에서 가장 담백한 그림이 있다. 그림을 그린 이는 그레고리 소로카(Grigoriy Vasilyevich Soroka)로 19세기 중반 러시아에서 살다 사라진 화가였다. 그는 노예인 농노로 태어나 죽을 때도 그 신분으로 죽었다. 일찍이 그림에 재능을 보여 당시 러시아 화단을 풍미하던 베네치아노프(Alexey Venetsianov)에게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지만 거기까지가 화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림 공부를 마치자 그는 다시 그의 주인 밀류노프(Milyukov)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그림에 대한 재능 역시 주인의 소유물이었다. 화가로서 한창일 나이에 그는 시골의 주인에게로 돌아가 시골 교회의 종교화 따위를 그리며 세월을 보냈다. 제대로 그림을 배운 영민한 젊은이에게는 여자가 따르는 법이라 소로카는 주인의 딸 리디아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강제로 농노 출신 여자와 결혼을 해야 했다.
1861년에 있었던 러시아의 노예해방운동 뒤에도 소로카는 여전히 농노 신분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가혹한 채찍질뿐이었다. 그는 목을 매 자살을 했다. 위키사전에 따르면 그가 사랑했던 리디아도 그의 사후 음독자살을 했단다. 그가 남긴 「낚시꾼」이라는 작품을 책에서 본 순간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담담하게 그렸다 것이었다. 「낚시꾼」은 1840년대 그의 나이 20대 초반에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 된다. 얼마나 좋은 나이인가? 그 눈부신 나이에 눈부신 햇살 아래서 그가 느낀 것은 시간이 멈춘 듯 한 적막감이었던 것 같다. 짧은 그의 이력을 엿보고 나서 다시 그의 그림을 본다. 그림 속에는 소로카의 담담함이 창백한 물빛 속에 투영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담담함의 정체는 슬픔일수도 있겠다. 한참 동안 소로카의 그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200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