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사들였던 책과 영화 DVD들이 집안 이곳저곳에 뒹굴어 다니다가 휴일 대청소 중 일부는 책장으로 일부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목차조차 열어보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그중 잊어질 뻔 한 영화가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지난여름 다른 몇 편의 영화와 함께 보고 싶은 영화로 찍어 뒀다가 상영관에서 관람 기회를 놓치고 술 취한 어느 밤거리에서 불법 복제 DVD를 사두었던 것인데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뀐 뒤에야 내가 그 영화를 사두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내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외면해버린 사정이야 생업의 번잡함 등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홍상수 감독 영화의 독특함 탓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문제작을 찍어내는 오늘날 주류 감독의 한 사람으로 홍상수의 영화는 다른 이들과 매우 차별적인 위상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주의라고 얘기되는 평단의 평가는 나와 같은 허접 관객의 입장에서는 와 닿지 않은 잡설일 뿐이고 오히려 그의 작품을 논할 때 자주 인용되는 일상성과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이 살갑게 달라붙는데 홍상수는 그의 전작을 통하여 이 일상성을 유지하면서 독자적 입지를 확고히 굳히고 있다 할 것이다. 나 혹은 우리 주변의 일상이 영화가 될 수 있다고 믿기는 힘들다. 일상성이란 우리가 먹고 싸고 자고 놀고 싸우고 엉키는 별 볼일 없는 무엇에 다름 아니다. 그런 우리 일상이 영화가 되어 스크린에 비추어질 때 뜨악함의 정체, 바로 그것이 홍상수 영화의 본질이 아닐까. 혹은 쿨하고 심플한 것을 미덕으로 치는 요즈음 세태에 비추어 보면 저게 무슨 영화냐는 볼멘소리 역시 홍상수 영화의 일상성에 기인하는 것이니 확실히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홍상수 영화는 기승전결의 오소독스한 이야기 전개도 없고 스펙타클한 볼거리도 없고 폭력은 유치하며 섹스는 허무하다. 결국 내 일상이 뻔하니 홍상수의 영화 역시 뻔한 것이라는 심리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DVD를 집안 어느 구석탱이로 던져버리고 해가 바뀌도록 잊게 만든 것이리라.
그런데 별 볼일 없는 우리 일상은 또 얼마나 복잡다단한 것인가. 우리는 일상 속에서 별 볼 일 없으면서도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짜여진 인간관계라는 그물코에 끼여 상처 입고 그 무덤덤한 일상 속에서 터지는 사소한 사건들의 파편을 맞고서 또 얼마나 자주 허우적대고 아파하는가. 게다가 우리 일상은 때로 얼마나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해 안 되는 일들과 마주치며 또 스스로 이해 안 되는 짓들을 하며 살아가는가. 아마 내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높은 점수를 줘왔던 이유도 사실 홍상수가 그려내는 그 이야기의 일상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별 거 없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두 다리를 꼬아 테이블 위에 걸쳐 놓고 엉덩이를 한껏 민 자세로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감상하는 동안 나는 별다른 기대도 혹은 별다른 실망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시 영화 도입부에서 날 것 그대로인 심드렁한 대화를 나누는 극중의 헌준과 문호는 영화감독 지망생과 대학 강사로 지식인들이고 술집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언행은 이중적이고 작위적이다. 지식인이 곧 잡놈이라는 말과 등가라는 도식 역시 대개 홍상수 영화의 전작과 다름이 없다. 곧잘 그들은 정의와 타인에 대한 헌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고 또 그런 속마음을 들킬 새라 전전긍긍이다. 이러한 지식인의 이중적이고 속물적인 작태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그러다 영화 어디 즈음에서 리얼한 베드신이 나오지 않을까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마음이 뻐근해오는 긴장을 느끼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내 스스로 영화가 그리는 지식이라는 잡놈 중 한 놈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홍상수의 영화는 김기덕의 호러 보다 훨씬 잔인하게 현실을 내 마음을 영화로 그려낸다.
루이 아라공의 시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제목처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는 내가 해독하기에 버거운 코드들이 가득하지만 한편 한결 관객지향의 직접 화법으로 바뀐 영화 속 대화 덕분에 최소한 하나는 확실하게 케취된다. 누가 아낌없이 주는 여자를 걸레라 욕할 수 있단 말인가? 극중 선화의 말처럼 나 또한 한 마리 개새끼이지 않는가? 나 또한 속물적 욕망을 가슴에 품고 있는 잡놈인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희망대로 멋진 모습이 아닐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가끔 부질없는 기대를 품고 또 거울을 쳐다본다. 대충 살펴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대한 평론가분들의 평가는 좋지 않다. 하지만 나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별 다섯 개 최고점을 주고 싶다. 2004
미래의 노래
루이 아라공
Louis-Marie-Antoine-Alfred Aragon
미래를 생각하면 나는 취한다
미래는 나의 술잔이다 애인이다
입술에서 연지를 벗기듯이
미래는 나의 머릿 속에서 윙크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혼을 장식하는 채색이다
여자는 남자를 활기 있게 해주는
떠들썩하고 우렁찬 소리이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가 거칠어질 뿐
나무 열매나 열매 없는 핵에 불과하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나고
사랑을 위해 태어나는 것이라고!